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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터치! 코리아] 적이냐 라이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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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꺾어야 할 상대이면서 서로를 빛내는 역설적 관계

벼랑 끝 경쟁에 지친 이들이 스포츠 라이벌에 열광한다

스포츠의 흥행 공식은 크게 둘 중 하나다. 강력한 지배자가 있거나, 강력한 라이벌이 있거나.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고진영과 넬리 코르다의 경쟁은 미국 여자 프로골프(LPGA) 투어에 오랜만에 등장한 ‘대박 상품’이다. 세계 랭킹은 1위 코르다가 2위 고진영을 앞서지만, 올 시즌 우승은 5승의 고진영이 4승 코르다보다 많다. 코르다는 고진영이 간절히 원했던 도쿄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나, 고진영은 코르다를 밀어내고 올해의 선수상을 들어 올렸다. 막상막하 숨 막히는 대결. 안니카 소렌스탐과 카리 웹 이후 거의 20년 만에 최고의 라이벌이 나왔다는 기대를 모은다.

조선일보

고진영이 지난 8월 4일 일본 사이타마현 가스미가세키 컨트리클럽에서 열린 여자 골프 1라운드 1번홀에서 드라이버샷을 하고 있다. 옆에는 여자골프 세계랭킹 1위 넬리 코르다(미국)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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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하면 최근 이벤트 경기에서 1대1로 맞붙은 미국 프로골프(PGA) 투어의 브라이슨 디섐보와 브룩스 켑카는 ‘기획된 라이벌’에 가깝다. 근육질 캐릭터가 겹칠 뿐, 누가 세계 최고인지 겨루는 사이가 아니다. 소셜 미디어로 말싸움하다 감정이 상했는데, 팬들과 미디어가 부추겨 갈등이 커졌다. 몇 달 전 둘이 화해의 뜻으로 포옹했을 땐 제발 화해하지 말라는 탄식이 곳곳에서 터졌다. ‘친구가 된다면 본인들은 좋겠지만, 골프를 위해선 좋지 않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억지 라이벌이라도 흥행에는 도움이 된다는 의미다.

왜 이토록 라이벌에 열광할까. 물론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이고, 그중에서도 라이벌전은 가장 뜨겁고 팽팽하다. 나란히 서있기만 해도 사람들은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내 놀라워하고, 차이점을 발견해 또 한 번 놀란다.

같은 목표를 향해 돌진하지만 라이벌은 적(敵)과 다르다. 반드시 꺾어야 할 상대이긴 하나, 제거하고 청산해서 멸망시킬 의도는 없다. 라이벌이 있기에 내가 있고, 경쟁할수록 서로의 가치가 증폭된다. 그래서 그 치열한 승부에 자신이 가진 전부를 걸고 던진다.

라이벌은 나 자신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증명해준다. 역설적으로 내게 누구보다 귀하며 응원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고진영은 코르다를 꺾고 올해의 선수상과 다승·상금 1위를 한꺼번에 거머쥔 뒤에도 “모든 걸 다 잘하는 코르다를 오늘 내가 이긴 건 운이 조금 더 좋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승리의 기쁨을 누리지만, 상대의 강점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승자는 겸손해진다. 코르다는 “오늘은 ‘고진영 쇼’였다. 오늘 같은 날은 그냥 앉아서 구경하는 방법밖엔 없다”고 찬사를 보냈다.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하면서도, 내일은 오늘과 다를 거라는 의지가 드러난다. 그래서 분노도 하고 슬퍼도 하지만 패자는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골프 역사 최고의 라이벌은 타이거 우즈와 필 미켈슨일 것이다. 흑인과 백인,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 등 대조적인 조건들을 갖추고 각자 어마어마한 우승을 쌓는 과정에서 실력을 겨뤘다. 사이 나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2년 전 우즈가 재기해 11년 만에 메이저 대회 우승을 추가했을 때 “너무 훌륭한 경기였어! 정말 잘됐다!”고 냅킨에 급히 적어 우즈 로커에 남겨둔 게 미켈슨이었다. 올해 미켈슨이 50세 역대 최고령 기록으로 메이저 우승을 차지했을 때, 교통사고 후 재활 중에도 “다시 해내다니 진정 감동적이다. 축하해!”라고 트위터에 올린 게 우즈였다.

최근 우즈가 샷 영상을 공개하자 미켈슨은 “내 기록 깨려고 돌아오는구나. 덤벼!”라고 재치 넘치는 격려를 보냈다. 내가 살려면 남을 짓밟아야 하는 ‘오징어 게임’의 시대라고들 한다. 벼랑 끝으로 밀어내는 극단적 경쟁에 지친 이들이 서로를 빛내는 스포츠 라이벌에 더욱 열광한다. 이런 고품격 승부를 우리 정치에서도, 나라의 가장 중요한 리더십을 결정하는 대선에서도 볼 수는 없는 걸까. 가슴이 답답해진다.

[최수현 스포츠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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