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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인민군 위장한 경찰에 속았는데…나주경찰부대 사건 유족들 배상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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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헌법재판소 정문.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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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7월 전남 해남·완도 지역에선 곧 인민군이 내려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들을 환영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퍼졌다. 일군의 군인들이 나타나자 주민들은 ‘인민군 만세’를 외치거나 환영대회에 참석했다. 주민들이 인민군으로 착각한 이들은 후퇴하던 ‘나주경찰부대’였다. 부대원들은 일부러 모자와 허리띠 버클에 붙은 경찰 표식을 가렸다. 인공기를 달고 섬에 상륙하기도 했다. 인민군을 본 적 없는 주민들은 이들을 인민군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 만세’를 외치는 주민들은 그 자리에서 사살됐다. 좌익 척결 명분이었다. 7월25~29일까지 주민 97명이 희생됐다. 가족이 몰살 당한 이들이 전체의 3분의 1에 달했다. 이 사건을 조사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10월 국가의 공식 사과와 위령사업 지원, 명예회복 조처 등을 하라고 권고했다.

진실화해위 진상규명 결정이 나오자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2009년 패소했다. 국가의 불법행위가 있은 날로부터 5년(민법상 소멸시효)이 지나 손해배상청구권이 사라졌다는 이유에서였다. 9년 뒤 상황이 바뀐다. 2018년 헌법재판소는 국민보도연맹 등 과거사 사건 피해자와 유족들이 낸 헌법소원 사건에서 민법 소멸시효를 민간인 학살 등 국가폭력 사건에 적용하는 것은 기본권 침해라고 판단했다. 국가기관이 조작·은폐해 오랜 기간 진실규명이 불가능했던 사건에 일반적 소멸시효를 적용하는 것은 헌법에 위반한다는 것이다.

헌재 위헌 결정을 근거로 나주경찰부대 사건 유족들은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2009년 확정된 패소판결이 발목을 잡았다. 헌재 위헌 결정보다 먼저 확정판결이 났고, 위헌 결정이 난 사건의 당사자도 아니기 때문에 재심을 청구할 수 없다는 법원 판단이 나온 것이다. 헌법재판소법은 위헌 결정이 나온 해당 헌법소원 관련 당사자만 재심을 청구할 수 있고, 위헌 결정 효력은 해당 결정이 나온 이후 사건에만 적용될 뿐 소급되지 않는다(형벌법규 위헌은 소급 가능)고 규정하고 있다. 유족들은 이같은 헌법재판소법 조항이 재판청구권 등을 침해한다며 헌재에 헌법소원을 냈다.

헌재 심리는 팽팽했다. 합헌 쪽에 선 재판관들은 “형벌법규에 대한 위헌 결정의 경우에는 소급 적용과 재심을 통한 구제를 허용하고 있으나 비형벌법규에 대해서는 법적 안정성을 위해 허용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위헌 쪽 재판관들은 “청구인들은 2018년 위헌 결정 전에 국가배상을 청구했다가 위헌 결정의 효력을 받을 수 없게 됐다. 권리 위에 잠자지 않고 적극적으로 권리를 행사했던 청구인들을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불이익을 주는 것은 평등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헌재는 재판관 5대4 의견으로 합헌 결정했다고 30일 밝혔다. 1950년의 학살 이후 57년만에 낸 소송에 대해 ‘너무 일찍 소송을 냈기 때문에 구제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놓은 것이다. 헌재는 다만 국회가 재심 청구 길을 터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다수의견 재판관들은 “청구인들이 적극적으로 권리를 행사한 것이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제주4·3사건특별법 등과 같은 국회 입법을 통한 구제 방안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전광준 기자 ligh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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