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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 코리아] 결혼이 특권층의 전유물이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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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재산·학벌·외모 안되면 연애도 결혼도 어려운 세상

가정 꾸릴 기본권 박탈 당한 청년들의 분노와 좌절 어쩌나

백수나 다름없이 지내던 대학 시절, 무라카미 하루키 유의 냉소주의에 심취해있던 친구가 어느 날 자취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얘기를 했다. “요즘 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아빠야. 생각해 보면 아빠는 연애도 하고, 취업도 하고, 결혼도 해서 나를 낳았잖아? 나는 하나도 제대로 못 할 것 같은데 말이지.”

조선일보

결혼식 이미지/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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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불안한 청춘이었으니 이런 한탄이 엄살만은 아니었겠지만, 결국 그 친구는 대학을 졸업한 뒤 취업하고 결혼해 아들 둘을 낳아 그럭저럭 산다. 맞벌이로 서울에 아파트도 장만했다.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고, 약간의 노력과 운이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1990년 기준으로, 1975년생 남성이 45세까지 미혼으로 남아 있을 확률은 1.5%밖에 되지 않았다. 같은 나이의 여성은 0.93%로 더 낮았다.(‘생명표 기법을 통한 미혼남녀의 사망력과 생애미혼율 추정’.)

‘한국 사회’라는 이름만 같을 뿐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2020년 현재 30대 남성 중 50.8%, 30대 여성 중 33.6%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산다. 이들 중 상당수는 죽을 때까지 미혼으로 남는다. 통계청 추계에 따르면, 한국 남성의 생애 미혼율은 2025년 20.7%, 2035년 29.3%로 전망된다. 여성은 12.3%, 19.5%다. 2035년 무렵엔 남성 셋 중 한 명, 여성 다섯 중 한 명이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뜻이다.

시대상의 변화에 따라 결혼과 출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농경 사회에선 자식을 노동력을 제공하고 노후를 부양해 주는 ‘자산’으로 여겼다. 지금은 키우는 데 힘과 돈은 많이 드는 반면 특별한 보상은 없는 ‘부채’로 인식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경제력 향상과 기술 발달 덕분에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도 충분히 선택 가능한 삶의 한 방식이 됐다.

문제는 비자발적으로 연애와 결혼 시장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이다. 특히 남성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뚜렷하다. 2018년 조사에서 결혼하지 않는 주된 이유로 ‘소득이 적어서’를 꼽은 사람이 남성 15%, 여성 2.6%였다. 35~39세 남성 미혼율이 대학원 이상 학력자는 17.8%, 고졸 이하는 43.6%다. 연애와 결혼이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 재산, 집안, 주거, 학벌, 직업, 외모 요건을 갖춘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돼가고 있다.

나이가 들면 짝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자손을 낳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지만, 동시에 기본적인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인류의 역사가 이 권리를 보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누리려는 투쟁의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세계인권선언은 “성인 남녀는 인종, 국적 또는 종교에 따른 어떠한 제한도 없이 혼인하고 가정을 이룰 권리를 가진다. 가정은 사회의 자연적이고 기초적인 단위이며, 사회와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규정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많은 청년이 이 권리를 행사할 기회를 사실상 박탈당했지만,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인한 도태로 취급될 뿐 누구도 진지하게 관심 갖지 않는다. 투표권 가진 사람 중 10~20%가 실제로는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어도 세상이 이토록 무관심했을까.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연애와 결혼 시장에서 밀려나 평생 홀로 사는 사람 대부분은 체념하고 적응하며 살아가겠지만, 일부는 좌절과 분노에 휩싸여 체제를 조롱하고, 원망하고, 공격할 것이다. 악화하는 남녀 갈등이나 ‘설거지남’ ‘퐁퐁남’ 같은 신조어들이 그 전조라는 예감이 든다.

[최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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