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승려에서 항쟁투사로…고통의 삶 등진 이광영 씨 안장식
'더는 아픔 없는 세상으로' |
(광주=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 불가에 귀의한 청년은 계엄군의 만행을 보다못해 1980년 5월 항쟁에 참여했다.
총탄에 맞은 후유증으로 41년을 고통 속에서 보낸 그는 가해자를 향한 원한을 모두 잊고 가겠다는 말만 남긴 채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26일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인 이광영(68) 씨의 안장식이 엄수됐다.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유가족은 유골함이 땅속에 안치된 순간에야 영원한 이별을 실감한 듯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붉은 흙이 한삽 한삽 유골함 위로 후드득 떨어져 내리자 소리 없이 오열하는 유가족의 어깨가 격하게 떨리기도 했다.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부끄럽습니다. 못다 이룬 진상규명은 우리가 반드시 마무리하겠습니다."
'폭도'라는 오명을 쓰고 만신창이 몸을 돌보던 시절부터 서로를 동지라고 부른 박갑술 5·18부상자회장은 "참담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승려가 된 이씨는 1980년 당시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준비하느라 전남 강진에서 광주로 향했다.
광주에서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한 그는 적십자봉사단에 입단해 부상자를 실어나르고, 의약품과 혈액을 모으며 투사가 되었다.
영면의 길 떠나는 5·18 피해자 |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에 그는 잠복 중이던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졌다.
병원에서 정신을 회복한 이씨는 총탄 파편을 몸속에 간직한 채 남은 평생을 하반신 불구로 살아야 했다.
이씨는 이후 승려로 돌아가지 않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도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향한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5·18 부상자들 모임을 조직할 때 한 축을 맡았고, 항쟁의 진실이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난 1989년 국회청문회와 1995년 검찰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고(故) 조비오 신부와 함께 계엄군의 헬기 사격 목격담을 증언하기도 했다.
진통제 없이 하루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나흘 전인 22일 짤막한 편지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고인은 '오랜 기간을 통증에 시달렸다. 5·18에 대한 원한이나 서운함은 모두 잊고 가겠다'는 말을 가족에게 전했다.
이씨가 고향인 강진의 한 저수지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날 전두환 씨도 숨을 거뒀다.
5·18 피해자들은 전씨가 사죄 한마디 없이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천수를 누렸다고 탄식했다.
이씨의 동생인 광성 씨는 "남은 가해자들만이라도 고백과 참회를 남기고 떠나기를 바란다"며 "하늘에서라도 서로 용서하고 화해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5·18 피해자, 마지막 여정 |
h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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