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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이슈 5·18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12·12 쿠데타, 5·18 유혈진압…참회없이 전두환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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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前대통령 별세 ◆

매일경제

"사과도 없이 떠났다."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향년 90세로 별세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나온 정치권 반응이었다. 제11·12대 대통령(재임 1980~1988년)을 지낸 전 전 대통령은 그동안 지병을 앓아왔고 이날 오전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지난달 26일 동지 관계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한 데 이어 한 달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대리인인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은 이날 "평소에도 죽으면 화장해서 그냥 뿌리라고 가끔 말했다"며 "가족은 유언에 따라 그대로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전 전 대통령은 1931년 경남 합천 태생으로 1955년 육군사관학교(11기)를 졸업했다. 군 사조직인 '하나회' 핵심 인물이었고, 하나회는 군 요직을 차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 전 대통령은 수도경비사령부 대대장,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등을 거쳤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12·12군사반란, 이듬해 5·18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으로 신군부가 국정을 장악했다. 전 전 대통령은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해 1980년 11대 대통령이 됐고 헌법 개정(간선제·7년 단임)을 통해 1981년 3월 12대 대통령에 당선돼 5공화국을 열었다.

1987년 6월항쟁, 후계자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민주화선언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5공 청산' 속에 백담사로 사실상 유배됐고 군사반란 등 13개 혐의로 1995년 구속됐다. 다음해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지만 최종적으로 무기징역이 확정됐고 1997년 12월 사면됐다.

지금까지 전 전 대통령은 5·18 유혈 진압에 대한 수많은 비판에도 사과하지 않았다.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문제로 기소돼 최근 1심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항소심이 진행 중이었다. 노 전 대통령과는 달리 역사적 재평가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국가장 등 예우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이다.

광주 학살·삼청교육대…민주화·인권 짓밟은 군부독재 상징

최고 권력서 사형 선고까지…전두환 '영욕의 삶'

군사반란으로 대통령 취임후
탄압정치 벌이며 권력 공고화
비판여론 막으려 언론도 통제

경제 고성장·물가안정 동시에
88서울올림픽 유치도 성과

퇴임 후엔 반란죄로 구속기소
무기징역 선고 1년도 안돼 사면

매일경제

1979년 12·12쿠데타 직후 신군부 세력 주축들이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 셋째가 노태우 전 대통령, 넷째가 전두환 전 대통령. [사진 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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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별세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표현은 많다. 신군부, 하나회, 체육관 선거, 비자금 조성 등. 여기에 더해 광주 5·18 민주화묘지 내 바닥에 박힌 '전두환 비석'도 있다. 집권 당시인 1982년 전남 담양 방문을 기념해 세워진 비석인데, 비석 일부가 옮겨져 참배객이 밟고 지나가도록 바닥에 묻혔다. 종종 여권 정치인들이 이 비석을 밟는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고는 한다. 그만큼 전 전 대통령이란 인물은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란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비난을 받아온 '역사적' 인물이 고인이 됐을 때조차도 통상 정치권에선 조문을 통해 애도를 표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보수 정당인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는 "조문할 계획이 없다"면서 다만 "당을 대표해 조화를 보내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조문 자체가 고민의 대상이 된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은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혼란한 정국에서 신군부를 이끌고 12·12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이듬해 5·18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뒤 체육관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 5공화국의 탄생이다.

집권 과정에서 사회악을 일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삼청교육대'를 설치했는데, 무고한 국민까지 순화교육 대상자로 끌려가 인권 탄압을 당했다. 또 60개가 넘는 전국 언론사를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로 묶어버린 언론통폐합 조치도 있었다.

전 전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했고 이는 정권 말인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통해 만천하에 공개돼 분노를 샀다. 그해 6월 최루탄에 맞은 이한열 학생의 사망은 6·10민주항쟁으로 번졌고, 결국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직선제를 수용한 6·29 선언으로 이어졌다.

1988년 임기를 마친 전 전 대통령은 '5공 청산' 분위기 속에 백담사에 은거했고, 1995년 김영삼정부 때 반란 등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가 1997년 12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재판 과정에서 "억울하다. 왜 나만 갖고 그래"라고 말한 대목은 지금도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그러나 생전 과오에 대해 사과의 뜻을 밝힌 노 전 대통령과 달리 그는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사과와 반성을 거부했다. 2017년 출간한 회고록에서는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가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2018년 기소됐다.

다만 집권기인 1980년대 연평균 10%에 육박하는 경제성장과 물가 안정, 실업률 하락은 공으로 간주된다. 이른바 '3저 호황'(저달러·저유가·저금리) 효과였을 뿐이란 지적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 '경제 가정교사'로 불린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등에게 경제를 맡겨 성과를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록 부족한 정권 정통성을 보완하려는 차원이라는 지적을 받지만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유치라는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고도성장기에 정경유착은 만연했고 재임 중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비자금 추징금을 미납했다는 점도 노 전 대통령과 비교된다. 전 전 대통령은 무기징역형과 함께 추징금 2205억원의 판결을 받았지만 완납을 미뤄왔다. 이 과정에서 "예금 자산이 29만원밖에 없다"고 말한 것이 두고두고 비판을 받았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검찰의 추징금 집행이 이뤄졌지만 현재 956억원이 미납 상태다. 더구나 종종 고급 골프장에서 목격되면서 추징금 미납 문제가 부각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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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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