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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영상] 전두환, 5·18 사과도 반성도 끝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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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역사에 씻을 수 없는 과오와 상처를 남기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시대적 상황이 나를 역사의 전면에 끌어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사에선 '대통령 전두환'이 아닌 민주주의를 짓밟은 정치군인을 지칭하는 말이 됐습니다.

전 전 대통령은 1931년 1월 18일 경남 합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대구공고를 졸업한 뒤 1951년 육사(11기)에 들어가면서 엘리트 군인 코스를 밟았는데요.

1955년 소위로 임관한 그는 ▲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 제1공수특전단장을 거치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습니다. 1958년 육군 장군이었던 이규동 씨의 차녀 이순자 씨와 결혼했습니다.

영남 출신 육사 동기와 후배를 중심으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결성을 주도한 그는 1976년 대통령경호실 차장보로 박정희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권력 중심에 바짝 다가섰습니다.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이 된 그는 그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흉탄에 서거하자 10·26 사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는데, 각종 월권행위로 군내 비판이 일면서 교체 위기에 몰리자 하나회 장교들과 군사반란을 도모합니다.

그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내란 방조 혐의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하고 전방 육군 병력을 서울로 출동시켜 군 지휘체계를 무너트리는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는데요.

군의 실권을 장악한 뒤 하나회 출신으로 군부를 재편한 그는 1980년 5월 17일 최규하 대통령을 겁박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3김(金)을 정치규제로 묶고 권력을 일거에 장악했습니다.

5·17 조치 다음날 광주 시민들은 민주주의 복원을 외치며 거리에 몰려나와 저항했으나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 유혈 진압을 감행하며 현대사 최대의 비극을 저질렀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짓밟은 전씨는 1980년 6월 초헌법적 기구인 국가 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시킨 데 이어 국회를 해산시킴으로써 대통령 권좌를 확보했고, 같은 해 8월 군복을 벗고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1980년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킨 뒤 그해 유신헌법에서 만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고, 이듬해 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는데요

.

그는 1987년 4·13 호헌조치를 통해 개헌 요구를 거부했다 6월 민주항쟁에 직면해 결국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그는 퇴임 뒤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1988년 재산 헌납을 선언하고 백담사에 칩거했으나 실제로 재산 헌납은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전씨는 1996년 내란, 내란목적살인죄, 뇌물 수수 등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추징금 2천205억 원이 선고됐습니다.

그는 2017년 회고록에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해 '성직자란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주장했다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법정에 섰고,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지만 불복해 항소했습니다.

지난 7월 항소심 재판에 불참한 채 꼿꼿한 자세로 산책하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기도 했고 8월 광주지방법원 법정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고인은 끝내 5·18민주화운동 유혈진압에 대한 사과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생전에 가족들을 통해서라도 5·18 사태에 대해 사과의 뜻을 표명한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는데요. 자세한 내용 영상으로 보시죠.

<제작: 문관현·손수지>

<영상: 연합뉴스TV>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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