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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변방의 고수, 다시 세상의 중심을 만들다” - 박해람 시인의 '여름밤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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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출판사 '시인의일요일'이 ‘시인의일요일시집’ 첫 책으로 박해람 시인의 '여름밤위원회'를 출간했다.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박해람 시인은 등단 당시부터 예리한 관찰력과 돌연적 이미지, 견고한 묘사력으로 정평이 났고, 시인을 꿈꾸는 문청들이 필사하는 텍스트 1위의 시인에 오르기도 했다. 정작 평론가들이나 문단의 자기장 안에서는 그에 대한 평가가 박했다.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한다는 그의 주변머리가 시인의 생활과 시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문단의 풍류나 사교생활과 거리를 두고 살아온 그가 감수해야하는 자업자득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섣불리 그를 무시하지 못한다. 오로지 시만으로 세상과 겨루는 변방의 고수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서 있는 변방을 한결같이 자기 시의 중심, 이 세상의 중심으로 만들어내며 스스로가 시인임을 증명하고 있다.

‘능력으로서 긍정되는 불가능’의 시를 쓰는 꽉 막힌 사람

시집 『여름밤위원회』는 등단 23년 만에 펴내는 박해람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쉽게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문체로 구상과 추상의 변형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적 시세계를 구축하는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다시 한번 자기 시의 절정을 선사한다.

시집 해설을 맡은 이병국 평론가는 박해람 시인을 “채움과 비움이라는 수행을 통해 자기 갱신의 삶을 지속하는 존재”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이번 시집에 대해서는 시인이 “스스로를 채우고 비우는 과정을 통해 세계를 대하는 이의 두려움을 지워내고 그로부터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모색하려 한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규정은 박해람 시인이 시의 무용함을 인정하면서도 결코 시를 포기하지 않는 시정신과도 닿아있다. 그는 평론가 김현이나 모리스 블랑쇼의 논리처럼, 무용함으로 오히려 인간의 억압을 벗겨내고, 불가능에 대한 긍정으로 효용성의 절대 가치를 전복시키려 한다. 그래서 감히 그를 ‘비움을 체현하려는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럼 박해람 시인에게 시인의 노릇이란 무엇일까? 시 「북벽」, 「만두」 「양파의 참을성」 「훈자, 강릉」에서 시인은, 틀을 강제하고 그 틀에 맞춰 재단된 세계 속에서 귀퉁이로 존재하는 이들을 보살피고, 언제나 잃기만 하는 세계 속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더라도 다음을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과 위안을 안겨주는 사람, 삶의 어느 국면에서 가득 찬 고통으로 결박된 존재를 비워내 다른 길의 풍경을 제시한다. 바로 그것이 시인의 노릇이고 몫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동쪽에서 도망치고
청춘이 되었다

청춘에서 헤어진 사람들은 모두 유족 같다
……
훈자, 무슬림 소녀 같은 봄

대자보들은 동쪽 해안의 캠퍼스에서 뜯겨졌다 중부에 서서 이쪽으로 혹은 저쪽으로 기울어지고 싶었다 그 덕에 시인이 되고 훈자에 도착해서 한 마리 여우가 돌아다니는 시를 쓰고 있다

- [훈자, 강릉]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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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의 페이소스, 상상력의 스펙트럼

박해람 시의 기본 바탕은 페이소스에 있다. 닳고 닳은, 빤한 포장지 같은 감정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을 섬세하게 다룬다. 이 페이소스의 서글픈 감정 밑바닥에는 인간으로서의 연민과 시인으로서의 자기 존재감이 놓여 있다. 시는 기본적으로 자아와 세계의 이질성에 맞서 어떤 유사성을 발견함으로써 서로의 틈새를 메꾸고 공동의 동일성을 짜 넣으려는 미적 행위이다. 박해람 시인은 이 공동의 동일성을 페이소스에서 찾아낸다. 삶의 경험을 전면화시키고 이를 경험적 진실이나 상상적 감응으로 받아들이면서 공동의 정서로 수렴해간다. 어떤 때는 세계를 잃기도 하고, 어떤 때는 청춘을 잃기도 하며, 존재의 무의미성에 맞닥뜨리지만 세속적 감정과의 일정거리 유지한 채 내면을 향한 깊숙한 그림자를 들여다본다. 이것이 그의 시법이다.

엄마는 아무 나무도 안 된 것이 분명하지만
가끔 아이에게 들러 울먹울먹 다독이다 가곤 하는데
아이는 그 울먹울먹하는 때가
엄마 같아 좋다
-[눈치] 부분

시집 '여름밤위원회'의 또다른 매력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상상력에 있다. 우주, 별, 지구, 대기권을 매개로 펼치는 우주적 상상력의 시 「달에는 펄럭이는 씨앗이 있다」 「창백한 푸른 점」 「지구라는 사실」 「꿈에서 잠 밖으로」에는 현실과 상상의 단차가 없다. 유려하고 매끄러운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공간 속에서는 독자는 마음껏 부풀고 자유롭게 유동하는 장소를 자기 내부 곳곳에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미적 쾌락이 극대화된다는 의미이다.

또 일상의 사소한 사물에서 이끌어내는 웅숭깊은 상상력은 요즘의 시들에서는 보기 드문 진경이다. 달팽이(「북벽」)나 털 뭉치(「흉내」), 만두(「만두」), 트렁크(「트렁크」), 양파(「양파의 참을성」) 볼펜(「손의 부축」) 등의 시를 읽어보면 박해람 시인은 도구화된, 장식화된 상상력에서 벗어나 가장 비근하고 익숙한 것조차 그것의 숨겨진 국면을 바라보게끔 만든다. 안착 없는 떠돌이의 삶과 사유, 관계의 부재에 대한 예리한 감촉과 파고듦이 오히려 그의 시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어내고 있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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