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 됐다면 백악관 핵심 실세로 세계를 호령했을 후마 애버딘.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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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10년 7월 23일, 장소는 베트남 하노이. 북한과 미국이 거의 유일하게 함께 참석하는 연례 국제 다자회의인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현장의 주인공은 단연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다. 그가 행사장인 국립컨벤션센터 로비에 나타나자 좌중의 시선이 집중됐다. 멀찍이 서서 힐러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한 무리 중엔 북한 외교단도 있었다. 힐러리는 그러나 북한 외교단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힐러리의 주의를 100% 독점한 건 젊은 긴 생머리의 여성 보좌관. 후마 애버딘이라는 이름을 가진 최측근이다.
힐러리가 “내게 딸이 한 명 더 있다면 그건 후마”라고까지 말하며 각별한 애정을 표했던 인물이다. 이때만 해도 둘은 몰랐다. 힐러리가 꿈에 그리던 백악관 주인 입성이라는 꿈의 목전에서, 믿었던 충복 후마 때문에 무릎을 꿇을 줄.
2010년 7월 23일 베트남 하노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가한 북한 대표부가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국 국무장관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힐러리 오른쪽에 보이는 여성이 후마 애버딘.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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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말하면 후마 때문이 아니라 후마의 전 남편 때문에 힐러리의 대선 레이스는 치명타를 입었다. 애버딘은 2일 발간한 회고록 『둘 다/그리고(Both/And)』에서 당시 일을 격정 토로했다. 힐러리를 공식 지지했던 뉴욕타임스(NYT)는 물론 영미권 전역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신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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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와 힐러리는 닮은 꼴이다. 남편의 잘못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까지 그렇다. 애버딘이 힐러리를 처음 만난 날 역시 빌 클린턴이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 스캔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던 1998년 8월이었다. 당시 퍼스트 레이디 담당 인턴으로 근무를 시작했던 애버딘은 “출근 첫날에도 (빌 클린턴) 대통령은 청문회 중이었다”며 “여사는 피곤해보이긴 했지만 침착했다”고 회고했다. 애버딘은 힐러리의 의연함에 반해 평생 충성을 다할 주군을 찾았다고 느꼈다.
힐러리 역시 당차고 똑똑한 여성 보좌관인 애버딘과 합이 잘 맞았고, 퍼스트레이디 이후 국무장관과 대선 후보로서의 삶에서 항상 애버딘을 곁에 둔다. 의상 스타일링부터 외교 정책까지 애버딘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었다고 한다. 2016년 대통령 선거 당시엔 남편 빌 클린턴 마저 힐러리에게 연락을 하려면 애버딘을 거쳐야 했을 정도라고 한다.
후마 애버딘의 회고록 표지. 2일 출간된 따끈한 신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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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버딘은 워싱턴DC 정계에서 셀럽이었다. 뉴욕옵서버는 2007년 “힐러리의 ‘미스테리 그녀’ 후마 애버딘은 누군가?”라는 제목을 달아 그를 집중 분석하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힐러리의 ‘비밀병기 그녀’로 통한 셈.
인도계 아버지와 파키스탄계 어머니를 두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성장해 미국으로 이주했다는 배경도 이목을 끌었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화장기 하나 없이 힐러리 곁에서 보좌에만 매진하는 그가 누구와 결혼할지도 뜨거운 관심사였다. 그런 그가 2010년 앤서니 와이어 뉴욕주 하원의원과 결혼을 발표했 때 NYT는 “(애버딘이 아깝다는 취지의) 못마땅한 분위기가 (워싱턴 정가에) 있었다”고 전했다.
앤서니 와이너. 일련의 성 범죄로 부인 후마 애버딘은 물론 힐러리 클린턴의 발목까지 잡았다. 이후 구속 수감됐다. AF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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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버딘의의 결혼은 결정적 실수였다.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면 핵심 측근은 따놓은 당상이었던 문고리 실세였던 애버딘 자신의 경력까지 추락시켰다. 문제는 와이너 의원. 그는 결혼 후에도 10명에 가까운 여성과 수년 간 문란한 문자 및 영상을 주고 받았다. 애버딘은 회고록에서 “앤서니의 블랙베리 핸드폰에 언젠가 한 여성이 친근한 어투로 문자를 보낸 것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며 “이게 뭐냐고 따지자 앤서니는 쿨한 척 ‘아 그냥 내 팬이야’라고 했고, 찜찜했지만 넘어갔다”고 적었다.
와이너의 말은 거짓이었다. 그의 행동은 꼬리가 밟혔고 곧 그는 의원직을 사퇴했다. NYT는 “모두가, 힐러리를 포함해서, 애버딘이 이혼할 것을 예상하거나 기대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애버딘은 결혼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남편을 위해 함께 공동 기자회견까지 하는 결기도 보였다.
애버딘은 회고록에 “가정을 지키겠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나는 힐러리가 사표를 내라고 할 거라 생각했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힐러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잘못을 한 건 후마가 아니라 그 남편이야. 나도 그 상황을 잘 알지.” 애버딘은 힐러리에게 평생 충성을 더 굳건히 맹세한다.
후마 애버딘은 2016년 대선 트라우마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 지난달 18일 미국 한 행사장에 참석한 모습.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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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또 남편이었다. 와이너는 제 나쁜 버릇을 못 버렸다. 2013년 정계에 복귀했고 뉴욕시장에 출마했지만 또 20대 여성과 1년에 걸쳐 음란한 메시지를 주고 받았음이 드러나고 수사를 받는다. 애버딘은 “사실 이미 앤서니의 정신 상태에 대해선 다 포기한 상태였고 더 나빠질 것도 없었던 상태”였다고 적었다. 애버딘은 결국 뒤늦게 이혼을 택했다.
이후 힐러리와 애버딘은 대선이라는 유일한 목표를 향해 질주한다. 그러나 힐러리가 국무장관으로서 업무 e메일을 자신의 개인 계정을 사용해 처리했음이 드러나고, 이 상당수의 e메일이 와이너의 노트북에서 발견되면서 상황은 나락으로 빠졌다. 와이너와 한 지붕 아래 살던 시절, 애버딘이 그의 노트북을 업무에 사용했던 게 결정적이었다. 하필 대선을 약 열흘 앞두고 와이너의 성추문 수사 과정에서 이 e메일들이 드러나면서 연방수사국(FBI)이 힐러리를 다시 조사하겠다고 나서면서 힐러리의 백악관 행엔 빨간불이 켜졌던 것.
도널드 트럼프 당시 공화당 후보와 TV 토론 중인 클린턴. AF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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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버딘은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토로했다. “전남편에게 전화를 걸고 벌벌 떨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HRC(힐러리 로드햄 클린턴)가 대통령이 못 된다면 그건 너와 나 때문이라고!”
그리고 힐러리는 패배했고, 도널드 트럼프의 4년 임기가 시작됐다.
애버딘은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남은 평생동안 내가 그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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