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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은 예전에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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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삶의 창] 김소민ㅣ자유기고가

‘사회적 합의’는 때로 비겁하다. 약자의 고통을 끝없이 방치하는 데 쓰인다. 그 말 뒤에 숨으면 차별하면서 차별하지 않은 척할 수 있다. “다름을 존중하는 입장”이라는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19일 국정감사에서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 사단법인 설립을 불허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동성애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서울시가 어느 한쪽 입장에서 판단하기는 적절치 않다.” 불허하면서 이미 한편에 서놓고, 불특정 다수의 합의에 책임을 전가한다. 지난 6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도 비슷한 말을 했다. 차별금지법에 대해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며 “사회적 논의가 부족해 시기상조”라고 답했다. 자기는 아닌데 남들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우아한 차별이다. 그 사회적 논의를 하라고, 그 ‘시기’를 만들라고 정치인이 있는 거 아닌가? 방치도 행동이다. 차별금지법이 시기상조면 모든 국민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밝힌 헌법 11조도 시기상조다.

‘사회적 합의’는 정체불명이다. 그게 뭔지는 각자의 마음속에만 있다. 존재에 대해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 치자. 그러면 수치라도 밝혀줬으면 좋겠다. 지난 6월 10만명의 국민동의청원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이 국회에 회부됐지만 이제까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국가인권위가 벌인 국민인식조사에서 88.5%가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만장일치하는 입법 같은 건 없다. 양당은 거센 비판에도 중대재해처벌법에서 5인 이하 사업장을 뺐다. 더불어민주당은 공수처법을 강행처리 했다. 차별금지법에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정치인들도 100% 지지로 당선되지 않았다. 몇%면 되나? 차별금지법이 처음 발의된 게 10년 전이다. ‘사회적 논의’를 해야 할 당사자인 거대 양당은 계속 남들보고 ‘사회적 합의’를 하라고 한다. 그사이 변희수 하사, 김기홍씨가 숨졌다.

‘사회적 합의’는 개식용 금지에도 붙는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따지면 70년도 더 된 논란이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개식용 금지를 검토하라고 지시하면서 다시 불붙었다.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들의 권리는 ‘사회적 합의’로 무한 유예됐다. 1991년 동물보호법이 제정됐지만 고기이면서 고기가 아닌 개들은 불법과 합법 사이 뜬장에서 죽어간다. 어떻게 죽나? 정부는 조사하지 않으니 모른다. 모르는데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할까? 책 <고기로 태어나서>(한승태 지음)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하재영 지음)을 보면, 고기가 되는 개들은 대체로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살다 전기 쇠꼬챙이로 죽었다. 닭? 돼지는? 개라고 안 돼? 하재영 작가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인간의 평등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최악의 처지에 놓인 누군가를 기준으로 삼아 모든 사람의 권리와 복지를 빼앗는 것이 평등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특정 집단에 대한 태도에 숨겨져 있는 편견을 의식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이다. 대개 우리는 강제가 개입되기 전까지는 이를 적절히 의식하지 못한다.”(동물권 학자 피터 싱어) 성 정체성, 인종, 성별 등으로 차별하지 말자는 데 합의가 된 사회라면 애초에 차별금지법이 필요 없다. 동물의 권리를 존중하자는 데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사회라면 애초에 개식용 금지법이 필요 없다. 누가 누구와 합의하면 되는 걸까? 노예제를 폐지하려면 노예와 주인이 합의에 도달해야 하는 걸까? 노예 주인들끼리 합의일까? 노예제를 폐지해야 하는 근거는 합의가 아니라 노예의 고통 아닌가? 그 법이 필요한지 물어야 할 대상이 있다면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개들에겐 어떻게 묻냐고? 개들은 예전에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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