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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법정에서 전동휠체어 운행을 시연한 이유는 [법정 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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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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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이 전동 휠체어에 타 앞뒤로 1m가량 움직였다. 비장애인이 옆에서 작동 방식을 설명했다. 단상에 앉은 이는 이를 지켜보며 속도 조절과 제동 방법, 무게와 가격 등을 물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모델을 보여주며 뭐가 다른 지도 물었다. 휠체어 판매장의 한 장면일까? 19일 서울행정법원 법정 안 모습이다. 작동 방식을 설명한 이는 변호인, 가격 등을 물은 이는 판사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재판장 강우찬)는 이날 뇌병변과 지적장애를 가진 A씨가 강서구청장을 상대로 낸 보조기기 급여거부 처분 취소소송의 공개변론을 진행했다.

A씨는 장애인단체에서 전동 휠체어를 빌려 쓰다 자가 휠체어 마련을 위해 강서구청에 휠체어에 대한 지원 급여를 신청했다. 그러나 강서구청은 지적장애가 있는 A씨가 전동 휠체어를 혼자 운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안전 문제와 규정 등을 이유로 지급을 거부했다. A씨는 병원에서 받은 인지기능 검사서까지 제출했지만 구청은 혼자 운전이 가능하다는 정신과 전문의의 소견서를 받아오라며 재차 거부했다. 이에 A씨는 올초 구청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A씨 측 변호인은 스스로 운전할 수 있는 경우에만 휠체어 비용을 지원하는 것은 경증 장애인에게만 비용을 지원하고 이동 보조 수단이 더 절실한 중증 장애인에겐 지원하지 않는 모순적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손을 움직이기도 힘든 최중증 장애인은 평생 누워서만 지내라는 얘기”라고 했다. “안전 문제 때문이라면 자비로 사는 경우는 왜 내버려두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A씨 변호인은 소장에 “급여 거부 처분 취소”를 ‘예비적 청구’, 즉 부수적 요구로 기재됐다. ‘주위적 청구’ 즉 주된 요구는 “휠체어 자체를 지급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관련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A씨 측은 이를 알고도 그렇게 했다.

장애인보조기기법은 운전 가능 여부와 상관 없이 휠체어가 필요한 이에게 예산 한도 내에서 전동 휠체어 자체를 지급하도록 규정한다. 그러나 절차를 규정한 고시, 즉 행정규칙이 만들어지지 않아 사문화된 상태다. 이 때문에 지자체들은 건강보험법 관련 규정에 의거해 휠체어 구입 비용 중 일부를 지원한다. 그런데 건강보험법 시행규칙에는 ‘혼자 운전이 가능한 경우’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A씨가 구청으로부터 비용 지원을 거부당한 이유 중 하나다.

변호인은 “주위적 청구는 패소가 뻔하다. 그러나 소관 부처가 모법의 취지를 실현할 절차 규정을 만들지 않은 ‘위헌적 입법 부작위’ 상태를 법원으로부터 인정받는 게 진짜 목적”이라며 “판결문에 그 내용이 들어가는 것, 그래서 소관 부처가 행동에 나서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승소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휠체어 시연은 A씨 측 변호인이 신청했다. 지적정애가 있어도 조작이 가능하고, 활동 보조사가 조작을 대신해 줄 수도 있어 안전에 큰 문제가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이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변호사도 증인으로 신청했다. 지체장애로 30여년간 휠체어를 사용해 온 이재근 변호사는 “우리에게 휠체어는 이동 수단이 아니라 손과 발”이라며 “‘여기에서 저기로 가고 싶다’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줄 필수적 수단”이라고 했다. 이어 “학업, 직업, 생활, 여행 등 행복추구권을 위해 가장 전제가 되는 게 이동권”이라며 “운전을 못할 것 같다는 이유로 제약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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