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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미국 노동시장, 노동자 우위로 전환?…힘받는 노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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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노동자 등 단체협약에서 승리

임금인상 나아가 ‘삶의 질’ 개선 요구

노동시장도 구직자 우위로 전환

노동경제학자들 “미 노사관계에 중대 변곡점”


한겨레

14일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의 한 레스토랑에 인력을 구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이 끝나가며 미국에선 노동력 부족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워싱턴/UPI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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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대유행이 끝나가며 경기가 회복되는 흐름 속에서 발생한 심각한 ‘노동력 부족’ 현상으로 인해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고용시장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 여파로 1980년대 이후 오랜 침체에 빠졌던 노동조합이 힘을 받는 등 미국 노동시장에 중대 변화가 진행되는 모양새이다.

최근 미국 주요 기업들의 단체협상에서 노동자들은 사용자를 상대로, 구직을 원하는 취업자들은 고용주를 상대로 협상력에서 우위에 서는 추세가 관찰되는 등 미국 노동시장의 역학이 변하고 있다고 <시엔엔>(CNN)이 17일 보도했다. 이들의 요구는 일자리 유지나 임금 인상 요구에 머물지 않고, 가족과 지내는 시간 확보 등 ‘삶의 질’을 추구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방송은 전했다.

미국 영화 산업을 떠받치는 6만 노동자들의 노조인 ‘공연무대종업원국제연대’(IATSE)는 18일부터 파업을 예고했다가, 고용주들의 양보로 단체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이들은 간식 및 주말 휴가 등 기본적인 삶의 질에 관한 노동조건 개선을 내걸고 처음으로 전국적인 파업을 선언했었다. 14년 만에 나온 민간 분야의 최대 규모 파업 예고기도 했다. 고용주들은 16일 밤 일단 서부 지역 노동자 4만명을 대상으로 이들의 요구 사항을 모두 수용해 협상을 타결 지었고, 미국 다른 지역의 2만명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같은 조건으로 협상을 끝냈다.

이번 파업 예고의 특징은 노동자들이 단순히 임금 인상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공연노조의 부의장 마이크 밀러는 “노동자들은 사기를 개선하고, 경각심을 키워야만 했었다”며 “건강과 안전 기준이 향상됐다”고 말했다.

농기구·건설장비 제조회사인 ‘존 디어’는 이 회사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연합자동차노조’(UAW)와 2주 전인 지난 4일 5~6%의 즉각적인 임금 인상 및 연금·수당 개선에 합의했다. 하지만, 노조에 속한 노동자의 90%는 이 합의에 반대했다. 14일부터 파업에 들어간 노동자들은 임금 뿐 아니라 회사의 차별적인 이중적 연금 계획을 개선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있다. 이 회사 노조는 지난해 10월 이후 1천여명의 신규 노조원이 가입해, 현재 1만명 이상의 노조원을 거느리고 있다.

남부 캘리포니아와 하와이에서 수백개의 병원을 운영하는 ‘카이저 퍼머넌트’ 의료 그룹의 3만2천명 간호사들도 파업을 준비 중이다. 이들은 임금 인상보다 환자들에 대해 더 나은 치료를 제공하기 위한 간호사들의 작업 환경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폰타나의 카이저 병원 간호사인 리즈 말로우는“우리가 가장 요구하는 것은 환자 안전이다. 이는 돈 문제가 아니다”며 인력 보충 등을 요구했다.

한겨레

미국 실업률 추이.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된 뒤 14.8%까지 치솟았다가 9월 현재 4.8%까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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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들이 이런 이런 자신감을 보이는 것은 현재 미국에서 구직자에게 유리한 노동시장이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공급망의 혼란과 인력난이 가중되면서, 기업들의 발등엔 불똥이 떨어졌지만, 구직자들은 구직을 서두르지 않고 있다. 간호사·항공기 조종사 등 인력이 부족한 특정 분야 뿐 아니라 식당·돌봄산업 등 저임 노동 분야에서도 구인난이 가중돼 있다. 지난 8월엔 430만명의 노동자가 직장을 그만뒀는데 이는 코로나19 사태 전인 2019년 같은 달에 비해 70만명이 많은 것이다. 해고나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그만 둔 것이 아니라, 새 직장으로 옮기거나 자발적 실업을 택한 것이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지난해 4월 14.8%까지 치솟았던 실업률은 지난 9월 4.8%까지 떨어졌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장관을 역임한 진보적 노동경제학자인 로버트 라이시는 코로나19 사태가 미국 구직시장에서 노동에 대한 공급과 수요를 재편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 사태 전에는 파업하는 노조와 노동자들은 고용주들의 대체인력 투입을 우려했으나, 이제는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의 이직을 걱정하는 상황으로 역전됐다는 것이다. 간호사, 항공관제사, 항공기 조종사 등 인력이 부족한 특정 분야 산업뿐만 아니라 식당·돌봄산업 등 저임금 노동분야에서도 구인난이 가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 코넬대학교의 통계에 따르면, 사업자의 규모에 상관없이 미국 전역에서는 10월의 첫 두 주 동안 38건의 파업이 발생했다. 올해 평균 한달 파업 건수를 이미 넘어선 수치이다. 10월 이후 발생한 건만 22건으로, 모두 2만4천명의 노동자가 참가했다. 미국 최대 노조인 ‘미국노동연맹–산별노조협의회’(AFL-CIO)는 올해 10월을 ‘파업의 달’이란 뜻인 ‘스트라이크토버’라고 명명했다.

팀 쉴리트너 미국노동연맹–산별노조협의회 공보국장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은 소모품이 아니라 필수적이라고 평가 받는 코로나19 확산의 탈출 국면에서 (자신들의 협상력을 높이는) 지렛대를 새로 발견한 것 같다”며 “노동자들은 이제 더 이상 손해 보는 합의를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와 동시에 노동조합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도 크게 개선됐다. 최근 갤럽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8%가 노조에 대해 긍정적 의견(미국의 노조 조직률은 6%)을 보였다. 이는 1965년 이후 가장 높은 긍정적 의견이다. 많은 경제사학자들은 지난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행정부가 파업 중인 항공관제사를 해고하고 대체 인력을 고용한 이후 사용자 우위로 돌아선 노사관계가 중요한 변곡점을 맞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고 <시엔엔>은 전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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