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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간 서울시 면적 7배를 태우더니…외계인 탐사까지 훼방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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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서부 덮친 초대형 산불 공포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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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앨런 망원경 집합체(ATA)’ 근처까지 접근한 산불 모습. 지평선 근처에 붉은 화염이 선명히 보인다. SETI 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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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테나 42개 앨런망원경 집합체
화마 위협에 2주 동안 ‘초긴장’
13km 앞서 방향 틀어 위기 모면
메마른 캘리포니아 ‘불씨’ 여전

“박사의 제안은 과학이 아니라 공상과학 같군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한 과학자의 투자 제안을 들은 민간재단 고위직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툭 던진다. 몇 초간의 정적, 그리고 흥분을 참지 못한 과학자는 비행기와 로켓, 원자력 개발이 모두 이런 ‘황당한’ 생각에서 시작됐다고 고함을 지른다. 과학자가 발표한 내용의 핵심은 외계에서 지구로 날아들지 모를 ‘인공 전파’를 찾는 연구에 자금을 대 달라는 것이었다. 1997년 개봉한 미국 영화 <콘택트>의 초반부 장면이다.

지구에서 인공 전파는 기술문명의 결과물인 텔레비전이나 통신장비에서 생긴다. 인공 전파가 우주 저편에서 건너와 지구에서 잡힌다면 외계에도 지적생명체가 있다는 뜻이다.

외계 지적생명체의 존재는 인류의 과학기술뿐 아니라 사회와 철학적 영역에 큰 파장을 던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인공 전파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정말 현실에 있다. 1960년대부터 ‘외계 지적생명체 탐사계획(SETI)’이라는 간판을 걸고 전파망원경에 눈과 귀를 집중하고 있는 과학자들이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SETI 연구소’가 이들의 총본산이다. 그동안 SETI 연구의 최대 걸림돌은 <콘택트>에서 묘사된 것처럼 연구의 신빙성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의구심이었다. 그런데 최근 새로운 걸림돌이 추가됐다. 설득이나 토론도 통하지 않는 그 상대는 바로 대규모 산불이다.

■ 망원경 턱밑까지 산불 접근

최근 미국 과학매체 스페이스닷컴은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초대형 산불이 지난 9일을 전후해 같은 주 북부에 설치된 ‘앨런 망원경 집합체(ATA)’ 13㎞ 앞까지 접근했다고 전했다. 13㎞는 강한 바람이 불 경우 2~3일이면 화마가 덮칠 만한 거리다.

ATA는 지름 6m짜리 접시 안테나 42개가 모인 전파망원경 대단지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480㎞ 떨어진 외딴 지역에 설치돼 2007년부터 가동됐다. 우주에서 날아들 수 있는 인공 전파를 잡는 것이 목표다. ATA는 SETI 연구소의 핵심 장비다.

그런데 이런 ATA가 하마터면 잿더미가 될 뻔한 것이다. ATA를 위협한, ‘딕시’라는 별칭이 붙은 산불은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산불 가운데 역대 두 번째로 규모가 크다. 지난 7월 중순에 시작됐는데, 두 달 동안 서울시 면적의 7배에 육박하는 4040만㎢가 소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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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주 북부에 설치된 ‘앨런 망원경 집합체(ATA)’. 총 42개의 접시 안테나가 있으며, 지적 능력을 지닌 외계생명체가 보낼지 모를 인공 전파를 찾는 게 주임무다. SETI 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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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화선 구축·망원경 방향 변경 ‘비상’

산불이 접근하자 ATA를 관리하는 ‘해트 크리크 전파천문대’ 운영팀에는 비상이 걸렸다. 알렉스 폴락 해트 크리크 전파천문대 기술 매니저는 스페이스닷컴을 통해 “지난달 말부터 2주 동안 ATA를 둘러싼 지역에서 나뭇가지를 치웠다”고 말했다. 산불이 접근하는 일을 저지할 방화선을 긴급히 구축한 것이다.

운영팀은 화마가 망원경을 덮치면 접시 안테나 방향을 조정할 계획도 세웠다. 안테나를 뽑아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수는 없지만, 안테나 몸체를 회전시켜 불에 강한 알루미늄이 많이 함유된 쪽을 방패처럼 화염에 맞서게 하려는 것이었다. 열에 약한 전자장치들을 최대한 보호하는 작전을 짠 것이다.

■ 위기 넘겼지만 안심 일러

다행히도 산불이 ATA 앞 13㎞까지 접근한 이후 바람이 잦아들면서 불의 진행 방향이 바뀌었고, ATA가 잿더미가 되는 일도 피할 수 있었다. 산불이 정말 들이닥쳤다면 SETI 연구가 치명상을 입을 뻔했다. 2014년 ATA 앞 3.2㎞까지 산불이 다가온 이래 최대 위기를 넘긴 것이다. 하지만 현재도 산불은 캘리포니아 산림을 태우고 있어 안심하긴 이르다. ATA 쪽으로 언제 방향을 틀지 알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산불이 구조적인 원인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SETI 연구소는 홈페이지를 통해 “기후변화로 미국 서부 전체가 산불에 취약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높은 기온으로 바짝 마른 나무들이 불에 타기 쉬운 장작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매년 거대한 산불이 발생하고 있어 ATA가 내년에도 온전히 살아남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별이 반짝이는 하늘이 아니라 불타는 지평선을 걱정스럽게 바라봐야 하는 SETI 연구자들의 시름이 더욱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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