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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밀레니얼 톡] 대화, 가끔은 새벽 응급실의 가장 중요한 치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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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 시의 응급실은 한산했다. 혈압 조절이 잘 되지 않아 머리가 아프다는 할머니를 진료 접수했다. 초기 수축기 혈압은 200이 넘었다. 뇌출혈을 감별하기 위해 시행한 CT는 이상이 없었다. 할머니는 경환자로 분류되어 조용한 구석에 누웠다. 혈압약을 꾸준히 복용했지만 혈압 변동이 심했다. 차분하게 수액을 맞자 혈압은 140까지 떨어지다가 갑자기 200이 넘어갔다. 병력 파악을 위해서 할머니에게 갔다.

“환자분, 약을 어디서 타드세요?” “다른 대학병원에서 처방받았어요. 잘 조절되었는데 6개월 전에 약을 바꾸자고 해서 바꿨더니 먹자마자 어지러워서 힘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바꿨는데 약이 안 듣는 거예요. 추가로 처방해달라고 했는데 일단 지켜보자고 했고 그 뒤론 조절이 안 되고 다시 어지러워서 미칠 것 같았어요.” 처방은 의학적 근거가 있어 보였지만 할머니는 회상하는 것만으로 상당히 괴로워 보였다. 감정이 영향을 미치는지 모니터에 표시된 혈압은 220이었다. 환자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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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괴로워하시면 혈압이 바로 올라요. 침착하셔야 할 것 같아요. 다른 힘든 일은 없으신가요.” “안 그래도 남편이 뇌경색을 다섯 번이나 맞았어요. 자상하고 좋은 사람이었는데 성격이 변해서 이상한 소리를 해요. 자꾸 복권을 사야 된다면서 돈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너무 화가 뻗쳐서 소리를 지르고 집을 나와버렸어요.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나까지 잘못되면 혼자 남을 남편이 어떻게 살아갈까 또 더럭 겁이 나요.”

역시 투약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더 오래 사연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자녀 분들은 안 계세요?” “딸은 시집가서 미국에 있어요. 아들도 대기업 다니다가 영국으로 발령받아서 가족과 함께 간 지 꽤 되었어요. 돈도 넉넉히 보내서 생활은 괜찮아요. 그런데 얼굴 본 지는 오래됐어요.” 흔히 말하는 성공한 자녀였지만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그럼에도 자식 자랑을 털어놓은 할머니는 조금 화색이 돌았다.

“다른 지인은 안 계세요?” “언니는 지방에 살아요. 가끔 통화해도 허전해요. 친구가 있기는 하죠.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만 그뿐인 것 같아요. 왜 이렇게 외롭게 태어났나 생각이 들고. 내가 떠나면 남편이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도 들어요.” 고요한 응급실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할머니가 이타적으로 굳건하게 살아온 이야기였다. 문득 혈압이 안정되고 있었다.

“할머니, 그런데 지금 혈압이 많이 떨어졌어요. 아무래도 감정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불안함이 더 큰 문제일 것 같아요.”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어요. 그런데 답답함이 어떻게 나아지겠어요.”

“주변에 의지할 사람을 찾으세요. 도움 주실 분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너무 힘들면 정신과 치료가 도움이 될 거예요. 저도 약을 먹고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에이, 선생님이 정신과 약을 왜 드시겠어요. 정말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해요. 약 먹으면 불안감이 가라앉아요. 가끔은 삶의 용기도 줘요. 혈압 조절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할머니는 너무 굳건한 성격이라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오히려 몸을 더 옭아맸으리라. 환자는 새벽의 의사에게 마음을 여는 눈치였다. “선생님이 먹는다니까 믿어볼게요. 정신과도 가볼게요. 감사합니다.” “네. 몸은 건강하니 마음만 나아지겠다고 다짐하세요. 불안할 때마다 제 말을 기억하세요.”

약을 쓰지 않았는데도 혈압은 완벽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는 외로울 수밖에 없어 보였다. 인간은 외적인 조건 몇 가지로 타인에게 쉽게 판단된다. 좋은 사람이었던 남편, 성공한 자녀, 비교적 여유 있는 노년, 그 굴레는 당면한 삶의 괴로움을 돌아보지 못하게 하고 신체의 불편감으로 쉽게 전이된다. 그래서 그 새벽의 가장 중요한 치료는 시간을 두고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너무나 흔한 것이지만 때때로 우리에게 놀랄 만큼 커다란 힘이 되는.

[남궁인 이대 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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