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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비번 해제’ 갈등, 미국에선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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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국에서 애플 아이폰의 비밀번호를 풀지 못해 주요 수사가 난관에 부딪히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최근 ‘고발 사주 의혹’ 사건에서도 핵심 인물인 손준성 검사가 압수당한 아이폰의 비번을 얘기하지 않아 푸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검언유착’ 의혹 사건에서 압수한 한동훈 검사장(사법연수원 부원장)의 아이폰도 아직 비번을 풀지 못했다. 지난해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 등 여권 일각에서 비번 푸는 걸 강제하는 입법을 하자는 얘기도 나왔지만 헌법이 보장한 진술거부권에 위배된다는 반발에 부딪히면서 지금은 수면 아래로 잦아든 상황이다.

그렇다면 애플 본사가 위치해 있고, 아이폰의 시장 점유율이 40%에 달하는 미국에선 어떨까. 물론 미국에서도 아이폰 비번 해제를 둘러싼 수사기관과 피의자, 애플 사이의 갈등이 10년 넘게 이어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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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아이폰의 잠금 화면. 애플 홈페이지


미국 수사기관은 테러나 마약 등 범죄를 막기 위해 피의자 스마트폰을 신속하게 열어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뉴욕주 검사인 사이러스 밴스는 2019년 미 의회에 출석해 “아이폰 비번을 일주일 안에 해제하기도 하지만 2년 동안 못 풀기도 한다”며 “살인, 강간, 성폭행 등(이 일어날지 모르는) 가장 중요한 시간에 스마트폰에 접근할 수 없는 심각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연쇄 테러 가능성이 있는 사건에서는 수사기관과 애플의 갈등이 격화하기도 한다. 2016년 14명의 생명을 앗아간 샌버다니노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2019년 플로리다주 해군 항공기지에서 총기 난사를 한 범인 모두 아이폰을 쓰고 있었다. 미 법무부는 법원에 소송을 걸면서까지 애플에 아이폰의 잠금을 해제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애플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애플은 회사 서버에 저장된 자료를 수사기관에 넘겨주긴 했지만, 고객 아이폰에 백도어(보안이 제거된 비밀 접근 통로)를 만들어 비번 해제를 도와주는 건 하지 않고 있다. 애플은 수사기관을 위해 예외적으로 백도어를 만든다면 이 백도어가 다른 범죄자나 권위주의 정부에 악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엔 정부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고 최고 성능의 보안을 유지해야 아이폰을 많이 팔 수 있다는 상업적인 이유도 있어 보인다.

미 수사기관은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애플의 태도를 비판했다. 지난해 1월 윌리엄 바 미 법무장관은 해군 항공기지 총기 난사 사건의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지금까지 애플은 (범인의 아이폰 잠금 해제에 대해) 어떤 실질적인 도움도 우리에게 주지 않았다”고 공개 저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대립은 ‘아이폰 비번 풀기’라는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 미 수사기관은 애플과 피의자 도움 없이 직접 아이폰을 풀기 위해 비번 해제 기술을 도입했다. 아이폰 비번을 푸는 기구를 만들어 파는 대표적인 회사는 세계에 2곳이 있다. 전직 애플 엔지니어가 설립한 미국 애틀란타 소재 회사 ‘그레이시프트’와 이스라엘 회사 ‘셀레브라이트’다.

이들의 기구를 사는 데는 9000~1만8000달러(약 1000만~2000만원), 연간 이용료는 3500~1만5000달러(약 410만~1760만원)가 든다고 한다. 애플의 보안이 점점 강화돼 최신 아이폰은 더욱 비번을 해제하기 어려운데, 이런 최신폰은 셀레브라이트에 따로 보내 2000달러(약 235만원)를 주고 비번을 해제하기도 한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선 최소 2000개의 지방 수사기관이 이러한 기구를 갖고 있다. 이 기구로 지난 5년 동안 미국에서만 수십만대의 아이폰 비번을 풀었다고 한다. 미국 외에도 다수의 국가 수사기관이 이 회사들의 기구를 이용한다. 셀레브라이트는 세계 150개국에 7000개 이상의 고객이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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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수사관들이 대구고검에서 ‘고발사주’ 의혹 핵심 인물인 손준성 대구고검 인권보호관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제는 비용과 시간이다. 미국 오레곤주 벤드라는 도시는 인구가 10만명인데 2017년부터 3년 동안 6만2761달러(약 7365만원)의 예산을 아이폰 비번을 푸는 데 사용했다. 비번의 자릿수가 늘어날수록 비번을 푸는 데 걸리는 시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6자리 비번을 푸는 데 11시간이 걸리는 프로그램으로 10자리 비번을 풀려면 12년6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이러한 문제로 인해 애플 등 제조사로 하여금 일부 백도어를 만들도록 하는 법안이 추진되고 있는데, 개인 보안을 더욱 중요시하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법안이 통과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은 정보통신(IT) 기술 강국이지만 일반 피의자들이 향후 수사·재판에서의 불이익을 우려해 알아서 아이폰 비번을 말하기 때문에 기술 개발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의혹의 중심에 선 검사들에 의해 ‘비번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널리 알려졌다.

지난해 검찰이 만든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보안 해제 기술은 미국의 70% 수준이다. 한국에서도 피의자의 권리를 제한하지 않으면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수사기관 주도로 아이폰 비번을 해제할 기술을 개발하거나 이미 그 기술을 가진 회사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조미덥 기자 zor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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