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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탑 두 개인 쌍탑가람, 신라서도 특별…전성기는 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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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 10일 온라인 신라학 학술대회

연합뉴스

경주 감은사지
[촬영 박상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경주 바다에 있는 무덤인 문무대왕릉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감은사지(感恩寺址)가 있다. 문무왕 아들인 신문왕이 682년 완성한 이 사찰 명칭은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이다.

사찰 건물은 대부분 사라졌는데, 삼층석탑 두 기가 우뚝 서 있어 시선을 잡아끈다. 국보로 지정된 석탑은 커다란 돌 하나를 조각하지 않고, 여러 석재를 조립해 완성했다. 두 탑은 규모와 양식이 비슷하다.

이처럼 탑이 두 기인 사찰을 쌍탑가람이라고 한다. 절에서 탑은 보통 한 기만 뒀다. 쌍탑가람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매우 드물고 특별한 배치법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신용철 양산시립박물관장은 국립경주박물관이 10일 온라인으로 여는 신라학 학술대회에서 신라의 탑을 연구해 이 같은 의견을 발표한다.

신 관장은 7일 공개된 발표문에서 "쌍탑가람은 사천왕사와 감은사에서 시작해 수도인 왕경(王京)의 경우 8세기에 많아지다 9세기에 소멸하는 양상을 보인다"며 "왕경 일대에서 쌍탑가람은 전체 사찰의 6%에도 못 미친다"고 강조했다.

이어 여러 부재를 맞추는 신라의 초기 석탑 양식은 백제 석탑 특징이라고 분석하고, 규모가 작아지면서 부재가 간략해지는 탑 형식이 정착했다고 설명했다.

신 관장은 탑의 기능에 대해 "예배와 공양 대상이며, 그 자체로 부처의 실존을 상징한다"며 "여기에 더해 신라에서는 개인의 축복 기원, 국가를 수호한다는 호국 개념, 망루 역할이 추가된 듯하다"고 주장했다.

김동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은 신라 사찰의 불상 재료가 대부분 흙이나 청동이었으나, 7세기 무렵부터 돌이 사용됐다고 짚었다.

김 위원은 "신라에서 석불상에 주목한 것은 8세기 석불사(석굴암) 조성 이후"라며 "석불사가 조성된 다음부터 신라 왕경의 평지 사찰에서도 본존상으로서 석불상이 제작됐다"고 했다.

다만 석불이 주류로 자리 잡은 뒤에도 백률사 금동여래입상,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인왕동 사지(寺址·절터) 소조불 등 청동이나 흙 재질의 불상이 만들어졌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강원도나 전라도에서 유행한 대형 철불(鐵佛)이 경주 부근에서는 제작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한정호 동국대 교수는 돌로 만든 물을 담는 그릇인 '석조'(石槽)를 연구해 경주에서 석조는 사찰 유적에서만 확인되며, 식수를 저장하는 용도가 아니라 승려들이 계율에 따라 목욕하는 시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학술대회에서는 이 밖에도 신라 왕경 사찰의 건물 배치, 신라 왕경 사찰의 분포와 경관에 대한 발표가 진행된다. 종합토론 좌장은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가 맡는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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