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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토)

아이들에게 '웃기는' 엄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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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최은경] 오랜만에 열다섯 살 아이와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무슨 이야길 하다가 한참을 웃고 난 후였던가. 내가 문득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는 어떤 엄마야?"

"갑자기? 음... 엄마는 웃겨."

"내가 웃겨? 정말? 너도 알지? 엄마 초등학교 때 개그맨이 꿈이었던 거… 우와 마흔 넘어 엄마가 꿈을 이뤘네. 기분 좋~다."

청소년기 기자의 꿈을 갖기 전,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내 꿈은 개그맨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기억이 전혀 없지만, 내심 남을 웃기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 좋고, 부러웠나 보다. 다행스럽게도 그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말을 재밌게 하는 재주도 없고,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하는 걸 좋아지도 않았으니까. 심지어 다른 사람이 하면 웃긴 이야기도 내가 하면 참 재미없게 하는 재주를 타고났다. 진짜 웃기는 이야기라고 시작했는데, 다 듣고 난 친구의 재미없다는 표정을 보는 당혹감이라니. 나는 이게 아닌데, 친구는 그게 다냐는 엇갈린 반응. 웃기는 재주는 없다는 걸 실감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내가 먼저 웃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남이 웃기는 이야기를 하면 리액션을 많이 해줬다. 박수를 쳐 가면 박장대소했다. 억지로가 아니고, 나는 남들이 썰렁하다고 야유하는 아재 농담도 너무 재밌다. 남을 웃기는 재주는 없지만 웃음은 많은 편이다.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사람은 정말 재밌구나. 이렇게 재밌으니 늘 주변에 사람이 많지. 나도 말을 잘하면 좋을 텐데.'

개그맨이 되지 못하겠구나 생각한 이후로 줄곧 말 잘하는 사람이 부러웠다. 나는 언제쯤이면 저렇게 센스 있게, 긴장하지 않고 말을 잘할 수 있을까 자주 생각했다. 말로 웃기지 못하니까, 글로 웃기는 건 가능하려나 싶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빵 터지는 글을 쓰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말도 재밌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남을 웃기는 일은 내 생애엔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열다섯 살 딸아이가 나를 보고 "엄마는 웃겨, 재밌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너무 환상적으로 들렸다. 내가 웃겨? 정말 내가 그렇게 재밌어? 신기했다.

사실 아이가 나를 웃긴 엄마라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왜냐하면 나는 아이들 앞에서는 솔직하다. 가식이 없다. 화장실 간다고 안 하고, 똥 싸러 간다고 말하고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 방귀도 뀐다(엄마가 방귀 안 뀌는 줄 아는 아이들도 있더라). 오버할수록 아이들이 웃어주는 게 좋아서 자주 오버한다. 적어도 아이들 앞에서만큼은 나는 연예인, 개그맨이었다.

베이비뉴스

'웃기고' 싶은 엄마의 가장 강력한 경쟁 상태는 바로바로, 게임.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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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웃기는 일은 어렵지만, 아이들을 웃기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조금만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도 애들은 웃는다. 운동을 한답시고 아이돌 안무를 보며 막춤을 출 때도 아이들은 아낌없이 웃어준다. 내가 '생존운동'이라며 팔다리를 흔들거나, 없는 근손실을 우려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아이들의 좋은 웃음거리가 된다(단, 전제는 있다. 타인의 몸이나 얼굴, 이름 등에 대해 놀리거나 비웃는 행동에 대해서는 주의를 준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에게만, 우리집에서 한정되는 일이니까. 부모지만 예의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할 때에도 따끔하게 말해준다). 창피할 수도 있는 순간이지만 나는 오히려 그 순간을 즐긴다. 더 웃길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웃지 마, 이거 얼마나 힘든 동작인데… 보기엔 쉬운 거 같지? 따라 해 봐. 니들은 못할 걸?"

'못할 걸’이라는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승부욕이 생겼는지, 너도 나도 따라 하는 아이들. 서로 안 되는 자세를 되게 애쓰거나, 사지를 흔드는 몸을 서로 보며 배꼽을 잡고 웃는다. 여자 셋의 왁자지껄한 시끄러움이 거실을 꽉 채운다. 행복이 별건가. 행복해서 웃고 웃어서 행복하다. 과장스러운 몸짓과 말투, 남 앞에서는 절대 하지 않는 일을 아이들 앞에서 하는 용기가 생기는 이유는 딱 하나다. 내가 잘 나든 못 나든, 엄마라는 이유로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해 주는 아이들이니까. 이런 아이들 앞에서는 망가지는 게 두렵지 않았다.

아이들이 크면서 엄마 손이 덜 가는 연령이 될수록 내가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종종 생각한다. 내가 정말 해주고 싶은 것은 아이들을 '웃기는’ 일이다. 나는 아이들이 친구들과의 관계에게 상처 받고, 성적 때문에 힘들고, 원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좌절할 때 심리적으로 바닥을 치더라도 회복탄력성이 좋은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그 과정에서 '웃기는' 엄마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엄마와 한판 수다를 크게 떨고 나면 저절로 충전이 되는 마법같은 일이, 우리 아이들에게 생겼으면 좋겠다. 그럴수만 있다면야, 나는 기꺼이 아이들의 개그맨이 되고 싶다. 아이들의 연예인이 되어 평생 웃기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드는 날엔 요즘 잘 나가는 아이돌 기획사 피네이션 대표 싸이의 노래가 제격이지 싶다. 그 노래 끝으로, 지금 틀어드립니다.

'때로는 영화배우 같아 때로는 코미디언 같아
때로는 탤런트 같아 때로는 가수 같아
너의 기분에 따라 난 난 (난 그대의 연예인)

그대의 연예인이 되어 평생을 웃게 해 줄게요
언제나 처음 같은 마음으로

난 그대의 연예인'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성에 대해 아는 것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서 성교육 전문가에게 질문한 성교육 책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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