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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일)

산책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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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서삼릉 산책길(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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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자주 멈춘다. 말을 종종 끊는다. 이것 봐! 저것 봐! 목소리가 높아진다. 산책 중에 꼭 그런다. 동네에 너무 좋은 산책길, 서오릉, 서삼릉이 있다. 기를 쓰고 올라야 하는 등산이 아니어서 좋고 대화 할 때 숨이 차지 않아서 좋아. 누군가와 같은 방향으로 타박타박 걸을 때에 생의 리듬이 생긴다. 감탄하느라 말을 끊어도 무례가 아니라는 사람에의 믿음이 생기고. 바닥에 추락한 매미의 생애를 아이고! 슬퍼하고, 상수리 나무의 도토리를 어머나! 귀여워한다. 우릴 둘러싼 모든 것들에 귀를 기울이게 돼. 몸을 기울이게 돼. 눈이 열리면 마음도 그리 된다. 얄미운 것들이 둥그레지고 서운한 마음이 편평해져.

대학 때 산악부였다. 그때도 산에 오르긴 부적합한 몸뚱아리였는데 기를 쓰고 따라다녔다. 설악산, 지리산, 치악산 등등 죽을똥 살똥 하면서도 기어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엉뚱한 캐릭터였다. 산에 가면 나 때문에 일행이 다 피봤다. 설악산 갔을 때는 중간에 가파른데서 드러누웠다. 나 더는 못가요. 버리고 가든가! 할 수 없이 그 비좁은 산기슭에 텐트를 쳤다. 하필 그날 밤 폭우가 쏟아졌는데 나는 세상 모르고 코를 골았다. 선배들은 뜬 눈으로 밤을 새며 내 잠꼬대를 들으며 얘를 어쩌면 좋니 했다고. 그렇게 장엄한 설악을 데리고 돌아와선 친구들과 춤추러 갔다. 자연과 유흥. 내 인생의 두가지 열정. (웃음)

자극이 좋았다. 무리한 행군에 발톱이 빠지면서도 숲이 주는 생동을 포기할 수 없었어. 자연의 자극은 정말 역동적이어서 시시각각 뇌에 푸른 물이 들었다. 돌멩이 하나, 나뭇잎 하나도 허투루가 없었다. 하찮은 존재가 하나도 없었다. 계절도, 사랑도 다 숲에서 배웠다. 등산화 하나 없이 청바지에 운동화로도 잘만 다녔지. 친구들이 신기해했다. 서울서 나고 자란 새침떼기가 종종 거지꼴을 해선 이따만한 베낭을 메고 나타나니 어이 없었겠지. 산에서 주워온 거북이 모양 돌 같은 걸 선물이랍시고 내밀었고.

돌이켜보니 자극적 인생이다. 부단히 생의 약동을 쫓아다녔다. 그러니 결혼과 육아가 행복했을 리 없다. 물론 그 시기에 최선을 다했지만 개인의 역사로는 침잠기. 내 이름도 본성도 포기했다. 산책 대신 학원가 복도를 전전했고, 생의 자극 대신 거실 바닥을 닦았다. 그러다가 발견해냈다. 간절하게 찾아낸 도시의 숲. 미술관과 도서관. 너무 뻔한 교훈 아닌가 반문한대도 어쩔 수 없다. 그들이 준 것은 숲을 너머 숨이다. 자극 너머 생존이고.

예술도 산책같다. 종종 자주 그림의 숲을 걷는다. 걸을 수 있는 속도의 가장 느린 걸음으로 가장 천천한 호흡으로. 걷다가 자주 멈추고 몸을 바짝 기울인다. 그림이 속삭인다. 천천히 살아도 돼. 존재만으로 기쁘잖아. 예술의 숲에선 함께 걷는 누군가와 더 친해진다. 삶의 속도와 방향이 저절로 맞추어진다. 내 마음이 스르륵 드러나고 당신 마음이 금방 들킨다. 우리는 서로를 더 잘 알게 돼.

어제 산책 중에는 벌레가 잔뜩 먹은 구멍 송송 나뭇잎이 지는 햇살에 반짝였다. 모든 게 고마워졌다. 산책은 생의 기쁨이고 깊음이다.

임지영 우버객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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