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5 (금)

이슈 미술의 세계

그림책을 음악처럼 읽는다? 한여름 물놀이가 비발디 ‘사계’를 만나면… [‘여름이 온다’ 이수지 작가 인터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경향신문

안토니오 비발디의 협주곡 ‘사계’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책 <여름이 온다>를 펴낸 이수지 작가를 지난 5일 그의 개인전 <여름 협주곡>이 열리고 있는 서울 한남동 알부스갤러리에서 만났다. / 이석우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무대 위에 등장한다. 공연이 시작되고 무대 뒤 커튼이 열리면, 이내 한낮의 태양이 환히 비추는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초록빛 너른 들판에서 형형색색 물풍선을 던지며 뛰어노는 아이들, 그 역동적인 한여름의 물놀이에 보는 이들도 함께 시원해진다. 이수지의 신작 <여름이 온다>(비룡소)는 여름의 싱그러운 소리와 왁자한 분위기가 물씬 전해지는 그림책이다. 비발디의 협주곡 ‘사계’ 중 ‘여름’이 이수지의 그림과 만나 한여름의 꿈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음악이 그림이 되는 순간에 관심이 많아요. 비발디 ‘사계’는 아이들과 함께 많이 들었던 음악이고, 들을 때마다 새로운 감흥이 있어서 언젠가 이 음악으로 작업을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음악과 그림, 이야기가 결합된 그림책 <여름이 온다>를 펴낸 이수지 작가를 지난 5일 그의 개인전 <여름 협주곡>이 열리는 서울 한남동 알부스갤러리에서 만났다. 한국인 최초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한 이수지 작가는 올해 최고의 그림책에 수여되는 2021 볼로냐 라가치상 픽션 부문 수상, 보스턴글로브 혼 북 명예상 수상, 뉴욕타임스 우수 그림책 선정 등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는 작가다. 신간 출간과 맞물려 일러스트레이션 전문 갤러리인 알부스에서 <여름이 온다>를 비롯해 그의 첫 그림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물이 되는 꿈> 등 주요 작품의 원화를 선보이는 개인전을 연다.

책은 작가가 비발디의 음악에서 느꼈던 감흥을 아이들의 신나는 물놀이와 접목해 표현했다. 오케스트라 무대에서 시작된 책은 비발디의 곡처럼 3개 악장으로 구성됐다. 각 악장의 시작점엔 비발디가 곡에 적어 넣은 소네트를 재해석한 짧은 글이 실렸고, ‘너무 빠르지 않게’ ‘느리게-빠르게’ 등 음악의 흐름을 따라가는 지시어가 등장한다. 글 대신 생동감 넘치는 드로잉과 음악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그림책이다. “어른들이 보면 그저 물장난일 뿐이지만, 아이들은 매순간이 진지하고 또 진심이죠. 그런 물놀이의 기승전결을 음악과 함께 풀어내자는 생각이었어요.”

책에는 ‘사계’를 들을 수 있는 QR코드가 실려 있어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작가는 “독자들이 음악의 템포로 책을 감상하는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음악에서 출발한 그림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 작가는 지난해 가수 루시드폴의 노랫말에 그림을 더해 <물이 되는 꿈>을 펴냈다. 파란색 수채 물감으로 물처럼 자유롭게 유영하는 소년의 신비로운 여정을 아코디언 폴드 방식의 책에 담았다. 이 작가는 “그림책 자체가 장르적 결합에 유연한 매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림책은 미술이면서 동시에 문학도 될 수 있는, 두 개가 교묘하게 서로를 밀고 가면서 펼쳐지는 책입니다. 그림책 자체의 세계도 무척 넓고 깊지만, 동시에 유연한 매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이탈리아에서 어떤 분들이 제 책 <거울 속으로>를 춤으로 표현한 영상을 찍어서 보내주신 적이 있는데, 무척 감동받았어요. <파도야 놀자>의 경우엔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음악들이 다양하게 나오기도 했고요. 그림책이 촉발한 생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푼 것인데, 마찬가지로 저도 음악이 그림책과 만났을 때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어요.”

이번 책 속에는 비발디 음악에 담긴 한여름의 변화무쌍한 날씨가 그림으로 펼쳐진다. 천둥과 번개, 폭우 등 날씨의 변화와 이에 개의치 않는 아이들의 놀이를 다양한 기법으로 표현했다. 1악장에선 강렬한 색감의 색종이 콜라주와 크레용으로 물풍선 놀이를 손에 잡힐 듯 역동적으로 그리고, 2악장에선 오선지가 등장해 물놀이의 배경이 된다. 흩어지는 물방울들은 오선지 위에서 음표가 되기도, 빛을 받아 무지개가 되기도 한다. 3악장에선 비발디 음악처럼 비바람이 몰아치는 격정적인 여름 풍경이 펼쳐진다. 독자들은 오케스트라 연주의 관객이면서 동시에 이 신나는 여름날 물놀이의 관객이 된다. 이 작가는 “각 악장 사이에 다른 질감의 종이를 썼는데, 악장을 구분하는 동시에 독자들이 물놀이라는 꿈에서 잠시 깨어나길 바라는 의도”라며 “그런 구분은 글로 쓰면 재미가 없고, 오직 물성을 지닌 책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미”라고 했다.

이 작가는 종이책의 물성을 서사에 적극 활용한 작업을 많이 해왔다. ‘경계 3부작’으로 불리는 그림책 <거울 속으로> <파도야 놀자> <그림자 놀이> 세 편은 책을 펼쳤을 때 가운데 제본선으로 주인공의 심리적 마지노선을 보여주거나,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표현했다. 처음엔 제본선이자 경계선이 양쪽의 세계를 분리하지만, 결국 그 경계가 허물어지며 두 세계의 즐거운 소통이 이뤄진다. 전작 <물이 되는 꿈>은 5.7m의 병풍으로 흐르고 이어지는 물을 표현한다. 한국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영국에서 북아트로 석사학위를 받은 이 작가는 “전자책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림책만의 매체성이 있는데, 그게 흥미롭고 매력적”이라며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책의 형식이나 판형과 맞아떨어지도록 고민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이수지 작가는 <여름이 온다>를 즐겁게 읽을 수 있는 ‘팁’으로 “음악을 듣듯 감상하면 좋을 그림책”이라고 말했다. / 이석우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무대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다시 무대 위 인사로 끝을 맺는다. 148쪽은 그림책으로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경쾌한 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음악을 듣는 기분으로 ‘여름 협주곡’을 감상하게 된다. “책 속 관객은 이 모든 퍼포먼스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이기도 해요. 음악에서 시작된 책인 만큼, 음악처럼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보통 음악을 들을 때 분석하며 듣진 않잖아요. 일단 듣고, 내 마음 속에서 어떤 감정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보게 되죠. 그림책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어요. 글이 거의 없는 그림책이지만, 음악처럼 나를 통과하게 내려버두는 경험을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 [뉴스레터] 식생활 정보, 끼니로그에서 받아보세요!
▶ 경향신문 프리미엄 유료 콘텐츠가 한 달간 무료~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