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9일 카스티요 페루 대통령 당선 확정에 환호하는 지지자들 |
(멕시코시티=연합뉴스) 고미혜 특파원 = 지난 6월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페루에선 '페루수엘라'(페루+베네수엘라)라는 조어가 자주 등장했다.
마르크스주의 정당 출신인 페드로 카스티요 대통령의 당선을 원치 않았던 이들은 카스티요 정권이 들어서면 페루가 베네수엘라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며 공포를 자극했다.
이웃 칠레엔 '칠레수엘라'의 유령이 떠돌았다.
지난 5월 제헌의회 무렵 우파 정부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그 반작용으로 좌파가 부상하던 상황에서 일부 국민은 칠레의 베네수엘라화를 우려했다.
베네수엘라가 하나의 상징이 된 것은 이미 몇 년 전부터다. 중남미만의 일도 아니다.
'가난할 수 없는 나라' 산유국 베네수엘라의 몰락 사례는 이곳저곳에서 좌파와 사회주의의 실패, 혹는 포퓰리즘의 실패 사례로 활용됐다.
정치적 의도로 오용되거나 남용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그만큼 베네수엘라의 극적인 추락은 아찔하고 자극적인 선례였다.
또 이런 베네수엘라의 위기엔 국제유가 하락 등 외부요인과 더불어 우고 차베스와 니콜라스 마두로로 이어지는 사회주의 정권의 실책이 큰 역할을 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미국 밀입국 시도하는 베네수엘라 이민자들 |
먼 우리나라에서도 '그러다 베네수엘라처럼 된다'는 말이 적잖은 경각심을 일으키곤 하는데 가까운 중남미 국가들에겐 더욱 피부에 와닿는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베네수엘라의 부침을 가까이서 지켜봤고, 중남미 각국으로 내몰린 베네수엘라 이민자들의 고단한 처지를 주변에서 숱하게 접했을 테니 말이다.
페루수엘라, 칠레수엘라뿐 아니라 아르헨수엘라나 브라질수엘라라는 표현도 몇 년 전부터 등장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라는 거대한 공포 속에서도 이번에 페루 국민은 좌파 정부를 출범시켰고, 칠레 국민은 우파 대신 좌파에게 새 헌법 작성을 맡겼다.
베네수엘라처럼 되는 것이 두렵지 않다거나 좌파 정권을 갈망했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분노나 변화를 향한 열망이 더 컸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페루에서 카스티요 대통령의 결선 상대는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딸이자 보수 민중권력당의 대표인 게이코 후지모리였다.
'독재자의 딸'에 대한 거부감, 부패한 기득권층에 대한 염증이 우파 지지자들이 외친 반공 구호나 페루수엘라 두려움을 눌렀다.
칠레 역시 2019년 대규모 시위를 겪으며 커진 변화 요구 속에 우파 대신 좌파가, 기성 정치인 대신 무소속 신인이 제헌의회 선거에서 선전했다.
브라질 대통령 퇴진 요구하는 브라질 시위대 |
이러한 결과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최근 영국 일간 가디언은 무명의 교사였던 카스티요 페루 대통령의 당선에 대해 "많은 이들이 코로나19가 아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정치적 지진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카리브해 공산국가 쿠바에서 지난달 펼쳐졌던 이례적인 반(反)정부 시위도 코로나19로 심화한 경제난과 무관하지 않았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극우 정권을 가장 세게 흔든 것도 코로나19 위기였다.
코로나가 부추긴 민심의 분노가 좌우 어느 한쪽 정권만을 향해 있지는 않음을 극명히 보여준다.
중남미에선 오는 11월 칠레, 내년엔 콜롬비아와 브라질에서 대선이 치러진다.
공교롭게도 모두 우파 정권이 들어서 있는 세 나라는 최근 모두 격렬한 반정부 시위를 겪었고, 거리에서 표출된 민심이 정권 교체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를 막으려는 사람들에게선 '베네수엘라화'를 경고하는 목소리도 분명히 나올 것이다.
베네수엘라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추상적인 공포보다 컸던 국민의 구체적인 분노가 페루와 칠레에서 그랬듯 이들 대선도 흔들지 주목된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이념 대결을 뛰어넘은 국민의 절실한 요구에 정치권이 귀를 기울이면 좋겠다.
mihy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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