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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대기업 꼰대 피하려다 판교서 '젊꼰' 만났네요"…스타트업 탈출하는 MZ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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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맛과 품질은 기본이고 종류도 서너 가지 되는 점심 메뉴, 주 35시간, 자율 출퇴근 등 유연 근무,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직급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의견 교환이 이뤄지는 회의 등. 판교로 상징되는 스타트업을 이야기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 아니 실제 모습입니다. 여기에 높은 성장성이라는 매력 요인이 더해지면서 스타트업은 일반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의 로망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런 대한민국 스타트업의 조직문화가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최근 고용노동부가 네이버를 상대로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한 결과 응답한 네이버 직원 절반 이상(52.7%)이 지난 6개월간 한 번 이상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고 합니다. '보통의 회사'가 아닌 스타트업 업계 맏형 같은 존재였기에 네이버 사례는 직장인들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네이버·카카오 등은 '보통의 회사'에 불과했던 걸까요. 매일경제 '어쩌다 회사원' 팀이 스타트업 직원들을 취재한 결과 눈부신 성장 이면에 짙은 그림자가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위기는 일시적 성장통일 거라 믿습니다. 한국 스타트업은 '보통의 회사'에 그쳐선 안 됩니다. 평범한 직장인이 로망을 이어가기 위해서도, 우리나라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말입니다.

◆ 성장과 함께 사라진 '스타트업 정신'

30대 초반 직장인 A씨는 올해 초 다니던 스타트업을 그만두고 대기업으로 직장을 옮겼다. 다닌 지 불과 석 달 만이었다.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 중인 인공지능(AI) 기술 회사였고 정부와 각종 글로벌 경진대회에서 수상할 정도로 유명했으며 유망해 보였다. 국책은행에서 투자자금도 유치했다. 그는 재수·삼수 끝에 꿈을 이뤘다. 첫 출근 전날, 그는 직원 간의 자유로운 아이디어 교환과 빠른 의사결정, '원팀'으로 움직이는 일사불란함 등 같은 스타트업 문화를 기대했다.

하지만 내부에서 본 AI 기업은 그가 꿈꾸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대기업 출신 대표는 회사 규모가 커지자 같은 대기업 출신 간부들을 중간관리자로 영입했다. A씨는 "대기업 출신 관리자들이 비선 실세처럼 행동했다"며 "그들은 그런 게 절차이자 위계질서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챙기는 게 대표의 장점이었지만 조직이 커지면서 장점은 단점으로 바뀌었다.

직원 수가 100명 가까이 되는데도 대표는 프로젝트 제안서 오탈자까지 직접 검사했다고 한다. A씨는 "창업 멤버들은 모두 회사를 떠났고 이제는 막 졸업한 개발자와 군 대체복무를 하는 프로그래머들만 남은 상황"이라며 "기대를 많이 한 내 잘못일지 모르지만 마치 혁신기업에서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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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기대와 회사 현실 간 괴리감은 자유로운 조직문화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발견됐다. 국내 엔터 회사에서 5년째 근무하고 있는 20대 직장인 B씨. 그는 지금 대기업으로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 처음에는 출퇴근 시간이 자유롭고 직원 대부분이 젊고 창의적이라 만족도가 높았다.

그런데 전 세계 한류 현상에 힘입어 회사 규모가 5배 이상 커졌고, 그 과정에서 주요 보직을 장기근속 개국공신이 아닌 소위 '스펙' 좋은 외부 영입인사들이 꿰찼다. 기존 직원과 외부 수혈 인사 간 불협화음은 멈추지 않고 있다. B씨는 "입사 후 처음으로 '조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보고'라는 이야기를 올해 들었다"며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다가 '상명하복' 문화가 싫어 수평적 조직문화로 이름난 판교 IT기업으로 이직한 30대 직장인 C씨. 그 역시 하루하루를 스트레스 속에서 보내고 있다. 자유롭기만 하고 업무 효율성은 떨어지는 조직 분위기 때문이다. 회사 성장 속도가 빨라 다양한 프로젝트가 여러 팀에 동시 분배된 게 문제다. C씨는 "업무 주체가 명확히 정해져 있는 대기업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면서 "매일 일을 하긴 하는데 내가 무엇을 하는지 몰라 손을 놓고 있는 날이 많다"고 토로했다.

이 같은 모호한 업무 분장은 팀 간 업무 미루기로 이어지고 있다. 한 프로젝트에 여러 팀이 걸쳐 있다 보니 팀장 직급이 낮은 곳이 허드렛일을 하는 일이 다반사다. '대기업이고 IT·스타트업이고 직장인의 삶은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좌절감은 한층 더 커진다.

◆ '포장만 급급' 회사 보며 실망감 커져

앞서 언급한 사례들은 스타트업이 대기업화되면서 초래된 문제다. 그 외에 왜곡된 조직문화, 포장에 불과한 혁신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 관련 스타트업에 몸담았던 D씨는 수평적 조직문화의 위선을 절절히 느끼고 사표를 냈다. 혁신적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내기 위해 존댓말 문화를 없앤 이 회사에는 무례함이 난무했다. 대표를 비롯한 경영진이 나이 많은 직원에게 '야' '너'라는 무례한 호칭을 쓰는 일도 일상이 됐다. D씨는 "직급과 직책을 모두 알고 있는 상황에서 평등한 언어 사용은 허울 좋은 구실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E씨도 스타트업에 분노를 느끼며 퇴사했다. 미디어에서 혁신 사례로 자주 언급되던 식품 스타트업 회사는 사실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었다. 국내에 없는 상품을 수입하고 혁신적 유통 시스템으로 유명했던 이 회사에 E씨는 큰 기대감을 품고 입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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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일은 접대와 홍보가 전부였다. 경영진 관심은 회사 운영보다 오로지 투자를 유치하는 일에만 쏠려 있었다. 그는 "경영진이 '엑시트(exit·회사를 매각하는 일) 제대로 해서 대박 한번 치자'는 얘기를 노골적으로 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면서 "내실 없이 투자 유치만 노리는 스타트업이 새삼 많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직원 수를 기준으로 보면 스타트업과 중소기업 간에 차이점은 없다. 직장인 입장에서 느끼는, 혹은 기대하는 차이는 아마도 조직문화일 것이다.

그런데 대기업에 비해 규모가 작은 스타트업에서 오히려 직원 권익 보호가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기업은 성추행이나 직장 내 괴롭힘 문제 등이 접수됐을 때 조사에 착수하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지만 스타트업에서는 이 같은 시스템이 미비하다는 것이다. 중소기업이 갖고 있는 문제를 스타트업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셈이다.

F씨도 스타트업 이직 후 이러한 문제점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국내 10대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그는 지난해 성장성이 기대되는 콘텐츠 전문 스타트업으로 적을 옮겼다. 새 직장에 경악을 금치 못했던 사건이 벌어진 건 이직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친하게 지냈던 젊은 팀장 한 명이 어느 날 성적인 농담을 메신저로 보냈다. 수치심을 느낀 그는 창업자에게 이를 알리고 개선을 요구했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었다. 회사 초기부터 함께한 팀장은 창업자와 막역한 사이로 조직 내 주요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F씨는 "이직 전 회사에서는 성추문이 발생하면 인사팀이 CCTV까지 확인할 정도로 세밀한 조사에 들어간다"면서 "미디어에 비친 스타트업 모습만으로 너무 장밋빛 미래를 기대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강영운 기자 / 강민호 기자]

영어이름 쓰면 혁신? 실리콘밸리처럼 자기계발 도와라

스타트업 전문가들의 조직문화 조언

우리나라 스타트업 조직문화가 갖고 있는 문제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자연스러운 결과물로서의 조직문화가 아닌, 실리콘밸리 등 해외 스타트업 모습을 단순히 흉내만 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입사한 직원이 갖는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감이 클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스타트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회사가 '대기업화'되고 내부 갈등이 초래된다는 사실이다. 에어비앤비 등 실리콘밸리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이기적 직원들이 만드는 최고의 회사'를 쓴 유호현 옥소폴리틱스 대표는 "우리나라 스타트업은 겉보기만 실리콘밸리식 조직문화일 뿐, 실제로는 직원들의 자아실현 가치관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실리콘밸리의 복지 환경은 양질의 인재를 모시기 위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게 유 대표의 진단이다. 그는 "시대별 직장인의 욕구 변화를 '생존→존중→자아실현'으로 나눠 볼 수 있다"면서 "과거 생존에서 존중의 시대로 넘어갈 때 세대 간 갈등이 표출된 것처럼, 최근 불거진 문제도 자아실현을 요구하는 20·30대 MZ세대 직장인과 이 같은 흐름을 읽지 못하는 스타트업 경영진 간 인식 차이에서 발생한 문제"라고 진단했다.

'대기업화'의 가장 대표적 현상으로는 대기업 출신 중간관리자들의 유입을 꼽을 수 있다. 스타트업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중간관리자들이 기존의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문제 해결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할뿐더러 그런 시도 자체를 조직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스마트워크 바이블'의 저자인 최두옥 베타랩 대표는 "조직이 커지면서 복지가 좋아지고 일이 안정화되면, 안정감을 원하는 직원들만 주로 남게 된다"며 "스타트업이 초기 기업문화를 유지하려면, 조직 내 작은 스타트업을 계속 만들어가면 된다"고 조언했다.

최 대표는 "흔히 기업문화는 구성원 개개인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의해 변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보면 기업문화에 영향을 주는 건 조직구조, 업무 프로세스, 평가제도 같은 시스템적 요소"라고 강조했다.

[이유섭 기자]

혹시 '젊은 꼰대'와 일하고 있나요 …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대한민국 직장인 이야기를 전하는 '어쩌다 회사원'에서 직장인 독자 의견을 기다립니다. 가까운 세대라 생각했던 10년 안팎 위 선배가 알고 보니 '젊은 꼰대'인 경우가 있었나요. MZ세대가 보기에 XY세대 '젊은 꼰대'는 직장에서 어떤 모습인가요. 아울러 30·40대 나이에 꼰대 소리를 듣게 된 중간관리자들의 억울함과 각종 애로 사항도 들려주세요.

◇의견·사례 접수=gold2@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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