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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타이타닉호 찾은 탐험가도 실패… '대서양 횡단' 최초 女비행사의 흔적 [세계의 콜드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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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창공의 여왕' 아멜리아 에어하트 실종 사건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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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아 에어하트가 비행기 조종석에서 문을 열고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다. 미국 연방의회 도서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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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 깊은 곳에 잠든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를 발견해 낸 탐험가 로버트 발라드는 2019년 7월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여성 비행사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 아멜리아 에어하트(1937년 7월 2일 실종·당시 40세)의 마지막 흔적을 찾는 일이었다. 무려 80여 년 전 세계 일주 비행에 도전하던 중 남태평양 상공에서 홀연히 사라진 에어하트. 그가 탔던 비행기 파편이라도 찾아내는 게 목표였다. 각종 자료를 연구한 뒤 멀티빔 음파 탐지기에다 원격 조종 수상 차량(ROV), 무인기(드론) 등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발라드의 탐사선 노틸러스는 태평양 적도로 향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발라드의 탐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그의 수색 과정을 담아낸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는 꽤 주목을 받았다. '20세기 인물' 에어하트는 지금도 미국과 유럽 등에서 '하늘의 퍼스트레이디'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21세기에 들어선 지도 20여 년이 지났건만, 그는 어떻게 세기를 뛰어넘는 아이콘이 되어 여전히 사람들 뇌리에 남아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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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아 에어하트가 비행기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AP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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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10분의 운명 같은 비행


1897년 7월 미국 캔자스주(州) 애치슨에서 태어난 에어하트의 삶에 있어 '결정적 순간'은 23세 때 예고 없이 찾아왔다. 다소 열악했던 가정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1920년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뒤, '비행장'이라는 곳을 구경하게 됐다. 당시는 비행기 제조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면서 일반인을 위한 시범 비행이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조종사들이 공중전(실전)을 통해 연마한 솜씨로 선보인 곡예 비행은 큰 인기를 끌었다. 바로 이 무렵, 에어하트는 우연히 유명 참전 용사의 비행기에 함께 탈 기회를 가졌다. 그의 인생을 뒤흔든 단 10분의 경험이었다.

어릴 적부터 야외 활동을 좋아하고, 1차 대전 땐 간호사로 자원할 정도로 매사 적극적이었던 에어하트는 망설임 없이 비행사의 길을 택했다. 1년여 동안 비행 강습을 받았고, 중고 2인승 복엽기도 구입했다. 그리고 1921년 12월 미국항공협회에서 비행 면허를 따냈다. 이후 '카나리아'라는 애칭을 붙인 자신의 첫 비행기와 함께 기록을 세워 나갔다. 이듬해 10월 여성 최초로 고도 1만4,000피트(약 4,267m) 비행에 성공했고, 1923년 5월엔 국제항공연합이 주는 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해 세계 16번째 여성 비행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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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아 에어하트(왼쪽)와 항법사 프레드 누넌(오른쪽)이 세계 일주 비행을 떠나기 전 함께 촬영한 사진. AP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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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의 여왕'으로 떠올라


어하트가 세기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계기는 1932년 대서양 횡단 비행이다. 전 세계 여성 최초였다. 4년 전 이미 남성 비행사들과 함께 대서양 횡단 비행을 했으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단독 비행으로 확실한 '1호' 도장을 찍었다. 그는 북미 대륙 동쪽의 뉴펀들랜드에서 출발해 14시간 56분 만에 대서양을 건너 북아일랜드의 한 농촌에 착륙했다. 이륙 후 얼마 안 돼 고도계가 고장나고 엔진도 파손되는 등 험난한 고비가 있었지만, 이를 모두 극복하고 일궈 낸 값진 성과였다.

사실 그 시절 비행은 목숨을 건 도전에 가까웠다. 당시는 항로뿐 아니라 항공지도나 항법시설 등이 전무해 자신이 어느 곳을 날고 있는지조차 알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에어하트는 끊임없이 비행 기록을 써 나갔다. 1935년에는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 홀로 건너간 최초 비행사 타이틀도 거머쥐었다.

에어하트의 이런 도전과 성공은 1930년대 대공황 속에서 전 세계인에게 희망을 줬다. 당시 태어난 여자아이의 이름을 '아멜리아'로 짓는 게 유행할 정도였다. 의회는 '항공비행에 참여한 영웅적 또는 특별한 공로'라는 군사 훈장을 그에게 수여했다. 여성에게 이 훈장이 주어진 건 사상 처음이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도 훈장을 받았고, 교황을 알현하기까지 했다. 특히 수많은 여성들에겐 커다란 자극이 됐다. 그도 이런 점을 인지하고 여성 조종사 발전을 위한 국제기구인 '나인티나인스'를 결성하는 데 힘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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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아 에어하트 실종 비행기 항로. 그래픽=강준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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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도전, 세계일주 비행


그러나 안타깝게도 에어하트의 마지막 도전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마흔 살이 된 1937년 5월, 여성 최초의 세계 일주 비행을 떠났지만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미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를 출발해 2만9,000마일(4만6,671㎞)의 적도를 도는 경로였다. 대서양을 건너 아프리카를 지나 아시아까지는 무사히 도착했으나, 출발 44일째인 같은 해 7월 2일 태평양 파푸아뉴기니의 도시 라에를 이륙한 게 마지막 여정이 됐다. 애초 계획대로면 4,000㎞를 날아간 뒤 호주와 하와이섬 사이에 위치한 하울랜드섬에서 연료를 보충해야 했는데, 이곳까지 200㎞를 남겨 둔 지점에서의 교신 이후 에어하트의 행방은 사라졌다.
"당신(이타스카호)에게 가 봐야 하는데, 볼 수가 없다. 연료가 고갈되고 있다. 무전으로 연락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1,000피트(약 304.8m) 상공을 날고 있다."
아멜리아 에어하트의 마지막 무전

이날 에어하트의 비행기 '록히드 엘렉트라'가 오길 기다리던 미국 해안경비대 경비선 이타스카호에 전달된 무전 내용을 보면 '연료 고갈에 따른 추락'이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다. 실종 소식을 접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의 지시로 비행기 66대와 해군 군함 9척이 보름여 동안 남태평양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기체 파편이나 조종사 유체, 그 어떤 유류품도 발견되지 않았다.

미 법원이 에어하트의 사망을 공식 인정한 후에도, 그의 마지막에 관한 숱한 소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비밀 첩보원인 에어하트를 납치했다' '미국 정부가 비밀 첩보원인 에어하트를 내쳤다' '지나친 유명세에 지친 에어하트가 실종 자작극을 벌이고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다' 등 각종 설이 나돌았다. 세간의 끊이지 않는 관심에,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은 그의 실종을 '세계 7대 실종 사건'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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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아 에어하트가 실종된 직후 관련 기사가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위)와 시카고데일리트리뷴 1면에 실렸다. 각사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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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도전' 아이콘으로 남아


가장 최근인 발라드의 탐사 이전에도 에어하트의 흔적을 찾으려는 시도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유골을 발견했다는 주장은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단골 소재다. 그럼에도 세상을 설득할 근거를 내놓은 이는 없다. 2012년엔 미 국무부 지원을 받아 에어하트 실종 사건을 조사했던 '역사적 항공기 회수를 위한 국제그룹(TIGHAR)'에서 "에어하트 실종 1개월여 후 영국 탐사팀이 남태평양 키리바시 니쿠마로로섬 근처를 찍은 사진에서 비행기 착륙장치로 추정되는 물체를 발견했다"고 밝힌 적도 있다. 이는 발라드 탐사의 주요 계기로 작용했으나 실제로 찾아낸 건 끝내 아무것도 없었다.

유품은커녕 비행기 파편 한 조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에어하트의 도전정신은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당대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온몸으로 부딪혀 깨 버린 그의 삶 자체가 '여성사(史)'로 평가받는다. 미국 곳곳엔 그의 이름을 붙인 거리와 학교, 공항이 있다. '아멜리아 에어하트 장학금'은 매년 또 다른 꿈을 키워내고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그가 남긴 유산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여성들이 운전대도 잡지 못하던 때, 아멜리아는 비행기를 몰았다. 여성 참정권이 여전히 낯설게만 보이던 시절, 그는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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