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7 (토)

"정치가 좀 농땡이쳐도 사는데 지장없다" [노원명 칼럼]

댓글 18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생각과 말이 무척 온건하고 합리적인 교수 한명이 내가 보기에 가장 불온하고 비합리적인 대선 후보에 기대를 걸고 있다길래 '왜 그러시오'하고 물었다. 그 대답이 꽤 재미가 있다. 요컨대 이런 주장이다. "큰 배를 움직이는 건 파도가 아니라 그 밑의 해류다. 대한민국을 배로 치면 정치는 파도이고 해류에 해당하는 것이 기업이다. 정치가 기업을 좌우하는 듯 보여도 극히 제한적이다. 한국 정치는 재미가 없다. 어차피 국가 운명을 좌우하는 것도 아닌데 좀 익사이팅해질 필요가 있다."

이 분의 전공은 경영학으로 기업 역할은 과대, 정부 역할은 과소 평가한 느낌이 있다. 정치학자라면 정치가 해류, 기업이 파도라고 주장할 것이다. 정치가 아무리 하찮은들 흥미 본위로 접근할 만큼 한가할까. 그래도 그 아이디어가 신선해서 꽤 많은 대화가 오갔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GDP 10위권에 재진입했고 1인당 GDP는 G7 국가인 이탈리아를 추월했다. GDP 순위는 환율 변수에 많이 좌우된다. 지난해 순위 상승은 코로나 피해가 상대적으로 덜했기 때문이다. 환율도, 방역도 실력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걸 정권의 치적으로 홍보한다. 그러나 열성지지층을 빼고 정권이 잘해서 GDP 순위를 올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면 누구 덕일까. 이전 정권, 그러니까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다진 기초체력 덕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경제성적표를 놓고 현 정권과 전 정권의 몫을 정확히 가르기란 불가능하다.

폴 크루그만은 그의 출세작 '하찮은 번영(Peddling Prosperity)'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 책에 따르면 로널드 레이건 집권 1기에 실업률이 매우 높았다. 레이건은 전임 지미 카터 재임중 시작된 경기 후퇴기에 집권했다. 그렇다면 레이건이 집권한 1981년 1월 이후 일어난 모든 실업을 레이건 탓으로 돌리는게 합리적일까. 한편 아버지 조지 부시는 참담한 경제 성적 때문에 재선에 실패했다. 그 경기침체는 레이건이 퇴임한지 불과 18개월만에 시작됐다. 이건 부시의 책임인가, 레이건의 책임인가.

비판자들이 주장하듯 문재인의 경제실정이 참혹한 것이라면 다음 정권은 어마어마한 후유증에 시달릴게 틀림 없다. 롤러코스터 하강을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걸 문재인 정부 탓으로 돌리면 된다. 그런데 만에 하나 경제 성장률이 올라가고 청년 실업률이 낮아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른바 '대깨'빼고(그때도 대깨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문재인의 공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보다 다음 대통령이(더불어민주당이 재집권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싫어할 것이다. 경제회복의 공은 마땅히 현직 대통령의 몫이어야 하므로.

나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 능력이 절망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누가 잘한것 하나만 콕 집어서 내게 알려줬으면 좋겠다. 도저히 찾을수가 없다. 그런데 GDP 순위는 올라갔다. 국제기준으로는 비교적 선전하고 있다. 그걸 전임 정부의 공으로 돌리면 깔끔히 정리는 되겠는데 양심은 부대낀다. 전 정부가 그렇게 유능했던가.

현대국가, 특히 대한민국처럼 고도화된 산업자본주의 국가에서 정치는 자체의 힘으로 GDP를 끌어올릴수도, 끌어내릴수도 없다. 정권은 경기변동에 올라탈뿐 그 흐름을 바꾸지 못한다. 복불복. 운 좋으면 호황 정부, 운 나쁘면 불황 정부다. 무슨 말인가. 대통령이 좀 무능해도 경제는 돌아간다(심지어 꽤 잘 돌아갈수도 있다). 반대로 케인즈급의 천하 기재를 대통령에 앉혀놓는다 해도 불황에 당할 재간은 없다. 남미, 아프리카처럼 잘 안돌아가는 나라에서 경제학자가 대통령이나 경제수장이 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지금까지 결과는 좋지 못했다.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기업이다.

'정치가 기업을 망하게 할 수는 있지 않은가'라는 반론이 있다. 작심한다면 그럴수 있다. 그러나 갈수록 그렇게 하기는 어려워지고 있다. 기업이 무너지면 제일 전전긍긍하는게 정권이다. 정권에 좋을게 하나도 없는데 왜 그러겠는가. 정권이 할수 있는건 최저임금 올려서 자영업자를 골탕 먹이는 정도다. 이 정부가 시도해온 무수한 반(反) 기업법은 확실히 잘하는 짓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기업은 여전히 잘 나가고 IT혁신기업들이 툭툭 등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정치는 경제에 있어 '실세'가 아니라 '허세'다.

그렇다고 정치가 아무래도 좋은 것은 아니다. 유권자는 정권의 경제능력보다 외교·국방 능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치에서 변별력이 있는 과목은 경제가 아니라 외교와 국방이다. 여기에선 실력차가 확실히, 눈에 보이게 드러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보다 본질적인 정부의 능력은 한 사회의 창조력을 유지하고 확장해 가는 능력이다. 좋은 교육제도를 통해 창조적 소수를 끊임없이 기업에 공급하는 것, 능력과 교양의 평균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국가는 망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국가 이익에 반하는 선택을 피할 수 있을만큼의 분별력과 용기가 있는 사람, 부모가 자식에게 그 언행을 소개할때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교양인이면 된다. 그런 지도자가 있는 나라는 쉽게 망하지 않는다.

정치로 인해 경제가 망하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정치가 국가를 망하게 경우는 늘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정치가 국가 운명을 좌우하지는 않는다는 교수의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노원명 오피니언부장]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전체 댓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