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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이슈 우리들의 문화재 이야기

일제 때 허문 양산읍성 성벽 기저부 첫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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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재재단, 지대석·채움석 발굴

1913년 지적도 기록과 일치

[경향신문]

경향신문

기저부 발굴 위치(붉은색 삼각)와 잔존 양산읍성(흰색 화살표) 위치.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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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에 경상도 양산읍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11척, 둘레가 3710척이었다.” 조선왕조실록(1492년·성종 23년)의 기록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과 양산군읍지(1878년)에 읍성의 존재를 기록했다. 1913년 일제가 작성한 양산 지적도에도 1500m 길이의 읍성 전체 둘레가 뚜렷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신작로 개설과 매립 공사로 읍성 대부분은 허물어졌다. 내벽 일부만 남은 상태다.

한국문화재재단은 19일 “양산 중부동 268번지 소규모 건축 건립 예정지(면적 184㎡)에서 양산읍성 성벽의 기저부를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기저부(基底部)는 ‘성벽의 몸체 부분 아래의 기초 시설’이다. 재단이 확인한 건 체성부(體城部, 성벽의 몸체 부분)의 지대석(地臺石, 성벽의 기단 하부에 평평하게 놓은 돌)과 채움석이다.

기저부의 전체 규모는 길이 14.36m, 너비 2.35~2.70m, 높이 64㎝ 정도다. 방향은 북동·남서향이다. 재단은 “서쪽 지정석 내부에서 조선시대로 추정되는 10㎝ 내외의 암키와 편들도 소량 출토했다”고 밝혔다. ‘田’자 명문이 나온다.

발굴 기저부 자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120m 정도 떨어진 중부동 181번지엔 읍성 내벽 쪽 성벽(길이 15m, 높이 2m)은 허물어지지 않은 채 남았다. 재단은 새로 발굴한 기저부와 원래 있던 내벽의 두 성벽 자리가 일제강점기 지적도에 기록된 읍성 위치와 일치한다고 밝혔다. 재단은 “양산읍성 전체 위치 등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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