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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이슈 세계 속 한류

[삶의 향기] DJ의 일본문화 개방과 한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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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 개방 고심하던 DJ에

“한국 문화 튼튼, 힘 못쓸 것” 조언

터키서 한국사극 몰입 여인 만나

중앙일보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연세대 의대 교수


20여 년 전 김대중 대통령 재임때 일어났던 일이다. 청와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본 대중 문화 개방에 대해서 큰 고민에 빠진 것을 느끼게 되었다. 김 대통령으로부터 “인 소장님, 우리가 문화 개방을 하게 되면 일본의 왜색 문화가 우리나라를 점령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게 됐다. 나는 120여 년 전 개화기 때 고종 황제의 수재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도록 초빙된 미국의 저명한 대학 교수의 말씀을 예로 들면서 답변을 드렸다.

그 교수는 우리나라에 10여 년 동안 머물렀던 경험을 상세한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의 결혼에 대해서도 경험한 바를 설명했는데, 이야기는 조선에 있던 시절 본인에게 한글을 가르쳤던 한 선비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시작된다. 교수가 자신의 집에 여러 손님을 초대했을 때 그 선비의 부인도 같이 왔는데, 다른 손님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부인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다가 다른 손님들이 다 떠나고 선비와 그 선비의 부인만 남으니 그 선비가 갑자기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았다. 그 선비가 부인에게 서양 집의 특이한 점을 일일이 설명하고 웃으면서 아주 부드럽게 서양 문화를 이해시키는데, 그 눈에서 정말 부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교수는 무엇 때문에 선비가 다른 사람들이 떠나고 나서 갑자기 부인에 대해서 태도 변화를 보였던 것인지도 궁금했지만, 더 궁금했던 것은 둘이 연애가 아닌 중매로 이뤄진 결혼인데 어떻게 부인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인지였다. 교수의 생각을 대략 정리해서 말하자면 아래와 같다.

그 당시 한 남자가 결혼할 시기가 되면 부모는 좋은 신부를 찾기 위한 부부간 대화를 시작한다. 먼 동네에서 제일 참하고 좋은 처녀가 있는 집을 수소문하고 여러 정보를 통해 결혼 상대로 가능성이 있는 신붓감을 찾은 뒤, 신랑 측 아버지가 우연히 놀러 간 것처럼 신부 아버지를 방문한다. 그들은 사랑방에 앉아 몇 시간 동안 장기를 두면서 날씨나 국가, 시대의 변화 등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긴 시간을 함께 보낸다. 그리고 장기도 대화도 다 끝날 무렵, 예비 신랑의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예비 신부 아버지에게 “우리 집에 아주 형편없는 아들내미가 하나 있는데, 그를 여워야 하는데 혹시 색싯감이 있는 집을 아느냐”고 묻는다. 뻔히 그 집에 좋은 신붓감이 있는 것을 알면서 말이다. 이때 신부 측에서 “잘 모르겠소”라고 대답한다면 그 결혼은 성사되지 않는다. 신부 측에서 “사실 내가 형편없는 딸내미가 있는데 그 딸을 마침 여워야겠는데, 우리 한번 둘이 잘해봅시다”라고 하면 그 결혼은 성사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들의 역할은 끝난다. 양쪽 어머니들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패물까지 전달되고 무속인과 상담을 통해서 적절한 혼인 날짜가 정해진다. 그리고 서양 교수가 보기에는 놀랍게도 신랑과 신부는 결혼식 날 이전까지 서로를 한 번도 못 본 상태에서 혼례를 올리고 새살림을 꾸려 살게 된다. 서양에서는 먼저 연애를 하고 둘 사이에 합의로 결혼이 이루어지는데, 어떻게 결혼식 날 처음 만난 사람들이 자신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선비처럼 다정하게 살 수 있는가, 물론 남들이 있을 때는 남 보듯이 하고 남들이 없을 때가 되어서야 님 보듯이 하고 말이다.

결국 교수는 한국 결혼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부모가 정해준 결혼 상대와의 결혼이 양 집안끼리도 맞춰가며 균형이 있고 적절하게 결혼이 이루어지니까 서양의 연애결혼 이상으로 적절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그들의 방법이 우리보다 더 섬세하고 세련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저는 이야기를 마치고 마음 놓고 문화 개방을 하라고 말했다. 일본 문화보다 한국 문화가 더욱 튼튼하니 일본의 왜색 문화가 조금은 유입될 수 있지만, 결국 한국에서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 문화는 서양 문화보다도 더 튼튼하니 걱정할 게 하나도 없으니 개방하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1년 정도 지났을 때다. 동서양 문화의 접경지인 터키 이스탄불에서 유적들을 구경하다 너무 더워 음료수를 마시려고 작은 가게에 들어갔다. 계산을 하려는데, 도대체 점원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목은 타들어 갔지만 계산 전에 음료를 마시는 건 양심이 허락지 않아 점원을 기다리다가 건물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가 ‘여기 사람 있냐’고 물어봤다. 뒤에 있던 여자분은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내가 부르는 것에 대꾸조차 없어 나는 속으로 참 기가 찼다. 그런데 그 여성이 보고 있는 것은 터키어로 더빙이 되어 있는 한국 사극이었다. 나는 속으로 엄청난 만족감을 느꼈다. 1년여 전에 문화 개방을 서슴지 말고 하라고 한 것이 정말 올바른 조언이었다고 생각했다. 이때가 전 세계 한류 붐의 시작이었다.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연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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