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서 화장실 흔적 첫 발견
세자 살던 동궁 근처, 대형 규모
바닥에 물 흘러 악취 막고 오물 정화
궁궐에서 일하던 '직원용' 추정
왕족은 방에서 '매화틀' 사용해
경복궁 동궁 남쪽에서 발견된 대형 화장실 위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상상도. 자료 문화재청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조선시대 궁궐의 화장실에서도 냄새가 심했을까? 적어도 경복궁 화장실은 고급 기술로 무장해, 냄새가 덜 났을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은 8일 경복궁 동궁(세자가 거주하는 곳) 남쪽 발굴조사에서 대형 화장실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약 30년 전 시작된 경복궁 발굴조사에서 화장실이 확인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
돌로 벽 쌓고, 진흙으로 틈 메운 고급 화장실
경복궁 동궁 남편에서 발견된 길이 10.4m, 폭 1.4m의 대형 화장실은 깊이도 1.6~1.8m, 성인 키와 맞먹을 정도로 큰 큐모다. 약 8~10명이 사용할 수 있는 칸을 갖추고, 하루 150명까지 수용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김정연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번에 발견된 화장실은 깊이 1.6~1.8m, 성인 키만큼 깊이 땅을 판 뒤 돌로 주변을 쌓고 진흙으로 틈을 메워 오물이 밖으로 새나가는 걸 막았다.
발굴조사를 맡아 진행한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양숙자 연구관은 “그간 다른 궁궐터에서 발견됐던 화장실들은 땅을 파서 길을 만드는 게 고작이었는데, 경복궁 화장실은 주변으로 오염이 안되게 아주 고급 기술을 사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화장실 안쪽에서 채취한 흙에서는 기생충 알이 매우 높은 밀도로 발견됐지만, 화장실 바깥쪽의 흙에서는 기생충 알이 발견되지 않고 깨끗했다.
━
'푸세식'이지만, 물 흘려 냄새 줄였다
경복궁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물을 이용해 화장실에 쌓이는 오물의 냄새와 독기를 줄였다. 자료 문화재청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북악산을 뒤에 업은 경복궁은 북쪽이 남쪽보다 고도가 약간 높다. 그래서 경복궁에는 동편과 서편에 각각 물줄기가 북에서 남으로 자연스럽게 흘렀다. 동궁 남편 화장실은 이 물의 흐름을 이용해 나름의 정화시설을 갖췄다.
물이 들어오는 구멍보다 나가는 구멍이 약 80cm 높다. 현대의 정화조 기술과 거의 흡사한 방식이다. 김정연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오물이 쌓이는 곳으로 물이 들어오는 길 한 개, 물이 나가는 길 두 개를 갖췄다. 그런데 물이 나가는 길이 들어오는 길보다 더 위쪽에 위치한다. 강화문화재연구소 오동선 학예연구사는 “상식적으로 물이 들어오는 곳이 더 높아야 할 것 같은데 반대로 돼 있어서, 시뮬레이션까지 돌려보며 화장실이 맞는지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물이 들어오는 곳이 나가는 곳보다 높은데도 화장실의 정화 기능이 가능한지 확인하기 위해, 문화재청은 민간 기관에 의뢰해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기도 했다. 파란색 진한 네모가 이번에 발견된 경복궁 동궁 남편 화장실 유구. 자료 문화재청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이 구조는 현재의 정화조 기술과 매우 흡사한 ‘선진 기술’이었다. 물이 오물과 닿으면서 발효를 돕고, 발효가 끝난 뒤 위에 뜨는 찌꺼기와 오염수는 밖으로 빠져나가는 원리다. 바닥에 남는 오물은 한꺼번에 퍼내는, 이른바 '푸세식' 화장실이었다.
이번 조사에서 자문을 맡은 한국생활악취연구소 이장훈 소장은 "하루 150명분의 오물까지 수용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며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먼저 등장한 현대식 정화시스템일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
8인용? 10인용? 남녀공용?… 자료가 없다
경복궁 배치도와 복궐도형 등 경복궁과 관련된 여러 자료에서는 화장실이 '측', 또는 '측간'으로 표시돼있다. 문화재청은 각종 자료와 실제 발견 위치를 비교해 이번 석조 유구가 화장실임을 확인했다. 노란색 네모 안이 경복궁 동궁 남편 화장실 유구가 위치한 곳. 자료 문화재청 |
1868년 경복궁 중건 당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화장실은 길이 10.4m, 폭 1.4m의 긴 직사각형 구조다. 발굴조사단은 2019년 동궁 남편 권역 발굴을 시작해, 지난해 11월 현장에서 형태를 확인한 뒤 올해 3월부터 ‘화장실’로 보고 확인 작업을 끝냈다.
이번에 발견된 화장실 흔적의 단면. 아래쪽의 검은 흙 부분에서는 기생충 알이 역대 문화재 중 가장 높은 밀도로 검출되기도 했다. 자료 문화재청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번에 발견된 화장실 시설 위로 위와 같은 건물이 지어져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 문화재청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깊은 화장실 시설 위로 나무로 된 건물을 지어, 사람들은 그 안에서 볼일을 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화장실의 생김새나, 남녀 구별 등 세부 정보는 남은 기록이 없다. 강화문화재연구소는 앞서 창덕궁과 창경궁에 남아있는 화장실 모사도를 참고해 가상으로 화장실 건물을 그려보고, 8~10인용이 가장 적절하다고 분석했다.
이번에 발견된 화장실 터는 경복궁에서 일하던 이들이 쓰던 공중화장실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왕족은 방에서 매화틀을 이용해 변을 봐서, 따로 화장실을 두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숙자 연구관은 “경복궁 배치도 등을 보면 화장실을 뜻하는 ‘측(혹은 측간)’이 총 75.5칸 있지만, 그간 경복궁 발굴조사는 궁의 중심부 위주로 진행돼 발견된 적이 없었다”며 "궁궐에서 일하는 사람 등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없는데, 이번 발굴로 당시 일반 궁 직원들의 생활을 더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정연 기자
▶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