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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이슈 미술의 세계

1908년 창덕궁 인정전에 걸린 '봉황도'의 숨겨진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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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자 글 모은 신간 '꽃과 동물로 본 세상'

연합뉴스

창덕궁 인정전에 걸렸던 봉황도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상상의 새인 봉황은 동아시아에서 상서로운 동물로 인식됐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여러 문헌에 봉황이 등장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이 1418년 "봉황새가 중국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라고 묻자 신하가 "순(舜)과 문왕(文王) 같은 덕이 있어야 봉황새가 와서 춤춘다"고 답한다. 봉황은 태평성세를 상징하는 새였던 셈이다.

조선시대 후기 민화의 소재가 되기도 한 봉황을 묘사한 그림이 1908년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 나타났다. 임금이 앉는 어좌(御座) 뒤에 해와 달과 봉우리 다섯 개를 그린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 봉황도가 걸린 것이다. 봉황도에서 봉황 두 마리는 꽁지깃을 교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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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께 창덕궁 인정전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 그림과 관련해 김현지 문화재청 감정위원은 신간 '꽃과 동물로 본 세상'(사회평론아카데미 펴냄)에서 "봉황은 일본의 의도를 직접 드러내지 않으면서 식민지 조선을 강등, 격하하는 데 적절한 주제였다"고 주장했다.

김 위원은 "조선시대에 이렇게 대형으로 배경 없이 봉황만 단독으로 그린 봉황도는 거의 없고, 19세기 궁중장식화에 묘사된 봉황 이미지와도 다르다"며 "상체를 숙이거나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는 등 유려한 곡선으로 묘사되던 전통적 봉황 자세가 아니라 매우 경직돼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봉황의 발 모양도 조선 봉황도가 아닌 일본 봉황도와 비슷하다"며 "이 그림이 제작된 시기가 일본에 강제로 합병될 즈음이라는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 일본에 의해 '황제 폐하'에서 '왕 전하'로 강등된 조선의 현실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제는 1907년 고종이 퇴위하도록 했고, 아들인 순종을 대한제국 황제 자리에 앉혔다. 그러고 나서 3년 뒤인 1910년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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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대조전 봉황도
[문화재청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김 위원은 1920년 재건한 창덕궁 대조전에 새롭게 등장한 봉황도 벽화에 대해서도 인정전 봉황도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대조전 봉황도가 중국 고전 '시경'(詩經)에 나오는 "봉황새가 나는데 날개를 펄럭이다 머물 곳 찾아 내려앉네. 여러 임금님의 훌륭한 신하 모셨는데 군자님들 부리시어 천자님을 아끼고 받들게 하시네"라는 구절을 표현한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대조전 벽화에 묘사된 봉황 열 마리는 천자를 아끼고 받들기 위해 모여든 신하를 상징하지만, 봉황 자체가 가진 다양하고 중층적인 상징성 때문에 의도를 숨기고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책에는 이외에도 미술사학 연구자들이 꽃과 동물을 소재로 한 그림에 관해 쓴 다양한 논고가 실렸다.

권혁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선시대 무관 초상화와 흉배(胸背, 가슴과 등에 붙이는 표장)에 그려진 동물을 분석했고, 김울림 국립춘천박물관장은 까치·호랑이 그림을 연구한 글을 수록했다.

최북·홍세섭·이한복 등 우리나라 화가가 그린 꽃과 동물 그림, 중국 화조화(花鳥畵, 꽃과 새 그림)와 영모화(翎毛畵, 새와 짐승 그림)에 대한 논문도 읽어볼 수 있다.

552쪽. 3만8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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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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