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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말 위의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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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영어. 교육.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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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창] 홍인혜ㅣ시인

영국에 머물 때의 일이다.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일행이 주문을 하고 있었다. 그는 “코크 제로”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점원이 “What(뭐)?” 하고 되물었다. 당황한 일행은 “지로”라고 황급히 고쳐 말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또 “What?”이었다. 그는 정성을 다해 zero를 서너번 더 발음했다. 벌의 날갯짓처럼 확실한 Z 발음이었다. 하지만 점원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등 뒤로 늘어선 줄이 부담스러웠던 우리는 아무 콜라나 대충 받아서 물러났다.

햄버거를 앞에 두고 우리는 말이 없어졌다. 각자 속내가 웅성거렸던 것이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코크 뒤에 붙을 말이 뭐가 더 있을까? 아무리 [z]가 한국에 없는 발음이라곤 하나 일행의 발화는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 있었다.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 척하는 것은 모멸이었다. 하지만 미묘해서 지적하기 힘든 범위의.

뻔한 말조차 못 알아듣는 척하며 은근히 무안을 주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관공서 업무 등 영어로 디테일한 대화를 나눠야 할 때는 더했다. 그들의 사소한 말 하나를 놓쳐 멍한 표정을 짓는 순간 상대의 짧은 한숨과 함께 나는 진상으로 등극하곤 했다. 영어권 국가의 일부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모국어가 타인들에게는 ‘외국어’라는 인식이 없는 것 같았다.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상을 “로컬”이라고 말해 모두에게 통쾌감을 줬듯, 내가 그 당시로 돌아간다면 국제공용어건 뭐건 ‘영어 역시 당신들의 로컬 언어다!’라고 외쳤을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나의 영어 실력은 특수한 방향으로 성장했다. 어휘력, 독해력, 문법이 늘었다기보다 눈치와 뻔뻔함의 기묘한 동반 성장이랄까. 괜히 되물어 짜증을 감당하느니 대충 맥락상 넘겨짚을 줄 알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가 모멸을 준다면 받아칠 임전 태세를 장착했다. 하지만 내 이런 모난 마음이 누그러들었던 곳, 모든 대화가 편하고 즐거웠던 곳은 언제나 비영어권 국가들이었다.

나는 스페인에서 숙소 주인의 친구 모임에 낀 적이 있다. 그들은 멀쩡한 직장인들이었음에도 놀랍게도 영어가 한마디도 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 했다. 손짓 발짓이 동원된 대화는 숫제 가족오락관을 방불케 했다. 그 대화를 통해 그들은 내 직업이 뭔지, 내가 왜 유럽을 떠돌고 있는지를 소상히 알아냈으며 내 그림 노트를 보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몽골 홉스골 호수에서는 낚시를 하러 온 일본인들과 마주쳤다. 그들도 영어 사용을 불편해했는데 그럼에도 우리의 대화는 유쾌했다. 낚시꾼들은 어류도감 같은 것을 펼쳐 이 물고기를 잡을 거라고 말했고 엊그제 잡은 물고기가 이만했다며 팔뚝을 흔들었다. 헤어질 때 나는 “바께쓰 이빠이!”라고 외쳐주었는데 그들이 알아듣고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대체로 언어로 소통한다. 언어는 훌륭한 소통수단이고 같은 언어를 공유한다는 건 더 많은 것을 나눌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거기엔 태도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나눌 수 있을지언정 나누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오고 가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내 말을 알아들을 능력이 충만함에도 내 말을 이해할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수많은 로컬 언어 중 주류의 말을 쓴다고 타자를 무시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나 역시도 내 언어의 위세에 기대 모종의 권위라도 쥔 양 행세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진 어휘가 많다는 것이 꼭 사유의 폭이 넓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다수의 언어에 능숙하다고 내가 우월한 것도 아니다. 나는 이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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