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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전국1등 천재가 허경영에 뒤진 선거 못봤나 [최경선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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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어느 천재가 선거에 뛰어들었던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 현대사에서 '공인된 천재'를 열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이다. 그는 1951년 제1회 중학입학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했다. 경기고에 입학한 지 4개월 만에 대입검정고시에 수석 합격했고 이듬해에는 서울대 물리학과에 차석으로 진학했다.

몇 년 뒤 '과학 신동, 기술자 천시에 실망, 행정대학원에 수석 입학'이라는 신문 기사가 실린다. 정 전 장관 스토리다. 이 기사를 본 이승만 대통령이 "나라 미래를 생각한다면 마땅히 물리학을 배워야 할 천재가 행정학을 공부하도록 내버려둬서야 되겠느냐"며 "그 학생을 유학 보내라"고 지시했다. 4·19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던 1960년 3월 말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 뒤로도 일사천리다. 미국 미시간주립대 박사 자격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덕분에 석사 과정도 거치지 않고 응용물리학 박사 학위를 2년 반 만에 취득했다. 그가 만 23세5개월이던 때다. 이 '한국인 최연소 박사' 기록은 55년 뒤에야 깨졌다. '소년 교수가 나타났다'며 미국 언론도 놀라워하던 그는 귀국 후 KAIST 설립을 주도했고 과학기술처 장관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이 천재 물리학자가 2007년 돌연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초일류 대한민국을 건설하려면 부정부패에 찌든 정치를 바꿔야 한다"고 일갈했다. "선진 과학기술 경제를 실현하려면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고도 말했다. 그는 1994년부터 한국해비타트 이사장을 맡아 '사랑의 집짓기' 봉사활동에도 열정적이었다. 그럼에도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그해 대선에서 그의 성적은 참담했다. 선거 하루 전 다른 후보를 지지한 영향도 있었지만 고작 0.06%를 얻어 9위에 머물렀다. '자칭 천재'이자 괴짜로 유명한 허경영 후보가 0.4%를 얻어 7위에 오른 것과도 비교된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바람이 매섭다. '공정한 경쟁'과 '능력주의'를 기치로 내걸어 호응을 받고 있다. 내친김에 선출직 공직후보를 대상으로 자격시험을 보겠다는 말까지 내놓는다. 문재인정부와 진보 교육감들이 만들어온 '깜깜이 경쟁' 풍토에 대한 반작용처럼 보인다.

인간사회에서 경쟁과 평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손흥민이나 류현진을 보라. 그들이 세계 무대에서 특급 활약을 펼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타고난 능력에 땀방울을 얹어 무수한 경쟁과 시험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과학자와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국가를 이끌어갈 뛰어난 인재를 배출하려면 공개적인 시험을 거치고 또 거쳐야 한다. 그러나 진보 진영은 시험과 경쟁 자체를 터부시한다. 초·중·고교 학업성취도 평가를 없애고 3% 표집시험으로 바꿨다. 학력 저하가 심각해지고 있어도 속수무책이다. 입사시험을 볼 때에도 이른바 '블라인드 채용'이라는 깜깜이 평가를 한다. 그 사람이 땀 흘려 쌓아온 대학·학점 등의 이력을 가려놓고 평가한다. 황당한 짓이다. 시험과 평가를 암흑천지로 만들어놓자 그곳에 판치는 것은 반칙과 위선이다. 엄마·아빠 찬스를 써가며 새치기를 해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이 대표는 '공정한 경쟁'이란 책에서 "실력 혹은 능력 있는 소수가 세상을 바꾼다고 본다"고 했다. 공개적인 경쟁이 공정하다고 말한다. 깜깜이 평가와 반칙에 질린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주장이다. 대변인을 선발하기 위한 토론 배틀도 신선하다. 다만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고 해도 '선출직 공직후보자 자격시험'은 과도하다. 서두에 천재 물리학자의 선거 실패 사례를 굳이 소개한 것도 이 말을 위해서다. 선거 결과는 성적순이 아니다. 시험을 너무 배척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과잉이어도 문제다. 선출직 공직자는 국민 선택에 맡기면 될 일이다.

[최경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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