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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단독] 정부 출연 연구기관들, ‘사망사고시 경영진 문책규정 만들라’ 권고 뭉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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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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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분야 연구를 수행하는 정부 출연 공공기관들이 연구실 등에서 사망사고 발생 시 경영진을 문책하는 규정을 마련하라는 정부 권고를 1년 가까이 이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기관은 이사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경영진 문책 규정을 만들지 않거나, 정부 의도와 달리 관련 규정을 개정하는데 그쳤다. 연구실 폭발 등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고, 4월 말 평택항 이선호씨 사망사건 등 산재가 이어지는 가운데 공공기관조차 안전사고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정부 권고마저 무시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21일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산하 기관 17곳에 ‘공공기관 사망사고 경영자 책임강화 방안 이행 협의 일정’이란 공문을 보내 지난달 25일 회의를 열었다. 오전 중에는 한국화학연구원,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한국기계연구원, 한국한의학연구원, 한국과학기술원, 한국생산기술연구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한국철도기술연구원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오후에는 광주과학기술원, 울산과학기술원, 대구과학기술원, 한국재료연구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한국연구재단, 한국원자력의학원, 한국나노기술원의 안전사고 책임자(행정부장 등)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는 공공기관 사망사고 발생 시 경영진 책임 강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로, 지난해 6월 전달된 관계부처 합동방안을 한국화학연구원 등이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서 마련됐다.

관계부처 합동방안은 2018년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숨진 고 김용균씨 사망사건 이후 마련된 후속조치로, 대통령 지시사항(공공기관 중대재해에 관한 원인규명 및 문책상황 조사보고)의 일환이다. 안전관리에 책임이 있는 경영진을 대상으로 문책 규정을 신설할 경우 사고 예방 효과가 있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다.

과기부에 따르면 이들 기관들은 1년 가까이 경영진에 대한 문책 규정을 만들지 않았거나 개정하지 않았다. 17개 기관들은 ‘이사회의 의결을 받아야 한다’라든지 ‘내부적 절차에 따라 문책 규정을 만드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등의 핑계를 댄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과기부가 최근 석 달 동안 여러 차례 공문도 보내고 회의도 개최했지만 소용없었다. 급기야 과기부는 지난달 초 회의 개최를 위한 공문을 보내면서 이들 기관들에 ‘문책 규정 개정 현황 및 향후 계획이 담긴 문서를 가져와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모르쇠’로 일관했던 기관 중에는 폭발 등 각종 안전사고가 일어났던 곳이 포함돼 있다.

한국화학연구원의 경우 지난 2016년 3월 학생 신분이었던 한 연구원은 다른 연구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화합물을 섞는 실험을 하다가 폭발 사고를 당했다. 순간적으로 유리 플라스크에 안에 들어있던 화합물이 폭발을 일으켰는데, 플라스크가 산산조각 나면서 손을 다쳤다. 이 사고로 이 연구원은 왼쪽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손가락이 절단됐다.

또 광주과학기술원에서는 지난 2019년 연구실에서 황산이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해 학생과 연구원 등 3명이 화상을 입었다. 당시 황산 2리터가 흐르면서 한 연구원이 손등을 다쳤다. 또 2015년에는 광주과학기술원 실험실에서 화학물질 시약을 폐기하던 중 화학반응이 일어나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해 학생 등 4명이 다쳤다. 조사결과 사고 당시 학생들이 염화티오닐(Thionylchlorid)이라는 염소와 황을 포함한 화학물질 시약을 비커에 모아 폐기물질보관통에 옮겨 폐기하던 중 폭발이 일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과기부 관계자는 “경영진에 대한 문책 규정을 만들면 책임감을 부여해 중대 재해에 대한 예방효과가 생길 수 있다”면서 “17개 기관들이 7월까지는 문책 규정을 만들겠다고 알려왔다”고 말했다.

한국화학연구원 관계자는 “문책 규정 대상자 범위를 처음에 행정부장까지 하는 것으로 했다가 과기부에서 시정하라는 요청이 내려와서 (그 위 직책인) 부원장까지 포함해 최근 문책 규정 개정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광주과학기술원 관계자는 “지난해 6월 정부 지침은 기관장 외에 임원에 대한 문책 규정을 만들라는 지시였는데, 우리는 임원이 기관장인 총장밖에 없어서 해당 사항이 없었다”면서 “그런데 지난 4월 임원 없는 기관의 경우 총장 다음 직위인 부기관장을 문책 규정 대상자로 넣으라고 정부 지침이 바뀌어서 문책 규정 개정에 시간이 걸린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부총장까지 문책 규정 대상으로 넣는 방식으로 개정안이 마련됐고 조만간 회의를 통해 통과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경진 공공연구노조 사무처장은 “이런 연구기관이 겉으로는 깨끗해 보여도 내부적으로 위험한 화학물질이나 장비를 많이 사용한다. 안전과 관련된 부분은 더 신경 써서 해야 하는 데 일종의 규제로 느끼고 있는 것 같다”면서 “(문책규정 제정과 같이) 불리한 사안에서 ‘연구기관’이란 특성을 방패막이로 내세우는 건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희경 기자 hjhk3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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