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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수익성 vs 안정성’… 원금보장형 상품 포함 놓고 시각차 [뉴스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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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 규모 255조… 수익률은 겨우 2%대

저위험·저수익 추구로 예·적금 이자 수준

90%가 원리금 보장형… 4대 연금 중 꼴찌

정치권·업계, 수익률 제고 제도 도입 공감

상품 운용 업권 이해관계 얽혀 지지부진

與 “실적배당형으로 제한, 수익률 높여야”

野는 원금보장형 포함시켜 안정성 추구

전문가들 도입 취지 감안, 수익성에 무게

단기 취업자 대책·가입자 선택권 필요성

수수료 포기 못하는 금융사 이기주의 비판도

퇴직연금 규모가 255조원을 넘어섰지만, ‘노후자금’이란 말이 무색하게 연간 수익률은 2% 안팎을 맴돌고 있다.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 등 다른 연금의 수익률이 10% 안팎인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상당하다. 이에 원금보장만을 목적으로 한 운용보다 고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금융상품에 투자하도록 자동지정해주는 ‘디폴트 옵션’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국회 논의는 수년째 ‘공회전’하고 있다.

세계일보

◆ 덩치는 255조, 수익률은 2%대

18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퇴직연금 적립금은 255조5000억원으로 전년(221조2000억원) 대비 34조3000억원(15.5%) 증가했다. 퇴직연금 적립액은 2016년 이후 5년 연속으로 10%대를 넘기고 있다.

퇴직연금 유형별로는 확정급여(DB)형 적립금이 153조9000억원으로 전체의 60.2%를 차지했다. DB는 근로자가 재직 기간 퇴직연금에 대해 신경 쓸 필요 없이 회사가 책임지고 퇴직 시점의 평균 임금과 근속 연수에 따라 퇴직연금 지급액을 확정하는 유형이다.

근로자가 일일이 퇴직연금을 어떻게 굴릴 것인지 지시하는 확정기여(DC)형에는 67조2000억원(26.3%)이 적립됐다. 연말정산 세액공제 등을 위해 개인이 추가로 가입하는 개인형 퇴직연금(IRP)에는 34조4000억원(13.5%)이 쌓였다.

규모와 달리 퇴직연금의 지난해 평균 수익률은 2.58%였다. 전년(2.25%) 대비 0.33%포인트 올랐다. 은행 예·적금 이자 수준으로, 지난해 코스피가 30% 넘게 오른 것과 비교하면 수익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특히 지난해 다른 연금 수익률을 살펴보면 국민연금 9.7%, 사학연금 11.49%, 공무원연금 10.7%였다. 국내외 주식과 채권·부동산 등에 분산 투자를 하면서 중위험·중수익을 추구한 덕분이다. 호주와 미국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도 퇴직연금이 10% 내외의 수익률을 내는 상황을 감안하면 4대 연금 중 퇴직연금이 압도적인 꼴찌를 기록하는 현실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는 퇴직금 적립금의 약 90%가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전체 적립금 255조5000억원 중 228조1000억원(89.3%)이 원리금 보장형 상품이었다. 유형별로는 DB 95.5%, DC 83.3%, IRP 73.3%였다.

반대로 펀드 등을 통해 돈을 굴리는 실적배당형은 24조4000억원이었다. 지난해처럼 주식시장이 활황일수록 고수익을 기대할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 원금 손실이 가장 큰 우려 사항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원금 손실을 꺼리는 정서가 많아 이렇듯 저위험 저수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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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성향·위험관리 반영한 디폴트 옵션

이렇듯 낙제점 수준인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디폴트 옵션(사전 지정 운용 제도)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디폴트 옵션은 DC형 퇴직연금 가입자가 운용 방법을 선택하지 않을 경우 퇴직연금 사업자가 사전에 정해놓은 방식대로 퇴직연금을 굴릴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이 경우 실적배당형 상품의 비중이 커진다면 더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안정성을 중시하는 가입자라면 원금보장을 우선시하는 상품으로 바꾸면 된다.

디폴트 옵션에서는 일반적으로 근로자가 젊을 때는 주식 투자의 비중을 높이고 나이가 들수록 채권 등 저위험 상품의 비중을 줄이는 식으로 퇴직연금을 운용한다.

현재 선진국에서 도입하고 있는 상품은 은퇴 시점, 시장 상황 등에 따라 자산배분(위험·수익관리) 기능이 더해진 TDF(타깃데이트펀드), 자산배분펀드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스태블밸류펀드나 부동산인프라펀드 등 가입자의 성향에 따라 펀드를 선택할 수 있다.

디폴트 옵션을 선택하면 근로자 입장에선 주식 투자 비중이 커지는 것과 비례해 고수익을 기대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투자 손실 위험도 커진다. 금융회사에 비싼 수수료를 물어야 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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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하면서 위험 관리해주는 TDF 인기

해외에서도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있었다. 가입자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홍보활동을 강화하거나 교육을 확대하기도 했지만, 실익이 크지 않다는 연구결과들이 속속 보고되면서 디폴트 옵션을 도입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선택한 401(k) DC형 퇴직연금의 경우 주식형 펀드가 43.5%(2016년 기준)로 비중이 가장 크고, 다음이 TDF 21.3%, 채권형 펀드 8.2% 등이 뒤를 잇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주식이 67.4%, 채권이 27.0%의 비중을 각각 차지한다.

특히 미국에서는 401(k)에 가입한 20대의 47.6%가 TDF에 투자하고 있다. 1994년 미국에서 처음 선보인 TDF는 목표시점(주로 은퇴시점)에 가까워질수록 자산 배분이 보수적으로 조정되는 펀드다. 가입자의 투자 결정 부담을 줄여주면서 위험관리도 자동으로 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미국 노동부도 TDF를 DC형 퇴직연금의 기본투자 대안 중 하나로 인정했다.

1992년 퇴직연금 ‘슈퍼에뉴에이션(Super Annuation)’을 도입한 호주에서는 ‘마이 슈퍼(My Super)’라는 디폴트 옵션 제도를 운용 중이다. 슈퍼에뉴에이션의 자산 배분은 주식이 절반을 차지하고, 인프라·부동산·헤지펀드 등 대체투자도 17%로 비중이 상당하다.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의 하철규 수석연구원은 “투자 경험이 부족하거나 연금자산관리에 시간, 노력을 투자하기 어려운 사람은 자산운용사가 생애주기에 맞춰 자산배분 비율을 자동으로 조정해주는 TDF를 활용하는 것이 좋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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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익성 vs 안정성’ 논의 지지부진

이렇게 저조한 수익률 탓에 ‘연금거지’가 탄생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면서 국회에서도 관련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아직 소득은 없다. 지난 20대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이 발의됐으나 회기 종료로 자동 폐기됐고, 올해도 두 차례 환노위 법안소위 논의가 이뤄졌음에도 아직 문턱은 넘지 못하고 있다. 겉으로는 ‘수익률을 높이느냐, 안정성을 높이느냐’의 쟁점이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퇴직연금 상품을 운용하는 업권의 이해관계까지 얽혀 실타래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현재 국회에는 환경노동위원회 여당 간사인 더불어민주당 안호영 의원·정무위원회 여당 간사인 김병욱 의원,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정무위)의 세 가지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여당의 개정안은 디폴트 옵션 운용 대상이 실적배당형 상품으로 제한해 수익률 제고에 초점을 맞췄다. 반면 야당의 개정안은 원금보장형 상품도 포함하도록 해 보다 안정성에 중점을 뒀다. 여당 안은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등 금융투자업계가, 야당 안은 은행·보험업권이 지지하는 모양새다. 상품 구성에 대한 이견은 있으나 정치권과 금융업권에서 퇴직연금의 수익률 제고를 위해 디폴트 옵션 도입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형성된 것이다.

논의 초기에는 수익성과 안정성이 팽팽한 듯했지만,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디폴트 옵션의 도입 취지를 감안해 보다 수익성에 무게가 실리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 국회에서 진행된 전문가 간담회에서도 이와 관련한 지적들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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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윤석명 연구위원은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퇴직연금을 30~40년간 납입하는 사람들은 투자도 공격적으로 하면서 고수익을 올릴 수 있지만, 직장이 불안정한 사람들은 가입 기간도 짧아 경제위기가 올 때 원리금보장상품보다도 수익이 못할 수 있다”며 “1% 남짓한 이자가 붙는 현재의 퇴직연금 운용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재앙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시립대 박종원 교수(경영학)는 “DC형 디폴트 옵션의 적격상품에 원리금 보장 상품을 포함할 것인지가 논란이 되는데, 가입자가 디폴트 옵션 적용 제외를 선택할 수 있고 사전 교육을 통해 방어기제를 충분히 가질 수 있다”며 “디폴트 옵션에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두는 것은 큰 실익이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생명보험협회 측에서는 “근속 연수가 짧은 근로자들이 큰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며 “실적배당형을 강요하지 말고 원리금보장형에 대한 선택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일각에서는 기존에 퇴직연금 상품을 굴리던 금융회사에서 수수료를 포기하지 못한 채 이기주의에 빠져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45곳의 은행 및 보험사, 증권사 등이 퇴직연금 운용에 대해 1조773억원의 수수료를 챙겼다. 참여연대는 최근 논평을 통해 “연금 가입자들이 금융기관과 관련 상품을 자율적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사실상 막혀 있어 과다한 수수료율 개선을 요구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수수료를 대폭 내리고 정부는 연금 운용을 감독하라”고 촉구했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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