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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허울좋은 이름 ‘혁명’… 실상은 권력 찬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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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50년대 초기 중국공산당의 상징적인 4대 영도자들. 좌측부터 저우언라이, 주더(朱德, 1886-1976), 마오쩌둥, 류샤오치/ 공공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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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57회>

인간의 정치사에서 혁명(革命, revolution)만큼 오용되고 남용된 단어가 또 있을까? 모든 혁명은 급진적 변화를 수반하지만, 모든 정치 급변이 혁명일 순 없다. 그럼에도 혁명이라 불리는 순간, 최악의 정치투쟁도 숭고한 운동으로 미화되고 정당화된다. 이름에 속아 실체에 눈을 감는 호모 로퀜스(Homo Loquens, 언어적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신석기혁명, 산업혁명, 과학기술 혁명 등은 단기간에 급진적으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고전적 의미의 혁명이었다. 그 결과 장기 지속되는 사회·경제적 구조의 대규모 변동이 발생했다. 반면 문화혁명은 1966년에서 1976년까지 불과 10년에 걸쳐 중국 사회생활의 윤리적 기초를 파괴하고 경제적 성장 동력을 제약한 단기간의 대규모 정치 혼란일 뿐이었다.

중국인이 흔히 말하듯 문화혁명은 한 판의 대반란(大叛亂), 대소동(大騷動), 대동란(大動亂), 호겁(浩劫, 대겁탈)이었다. 공식명칭은 “중국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었지만, 그 실상은 혁명이 아니라 세계사의 큰 흐림에 거스르는 반혁명의 역류였다. 반혁명을 혁명이라 부르는 전형적인 인지 착오다.

많은 문혁사가들이 동의하듯, 문혁은 본질적으로 권력투쟁의 드라마였다. 마오쩌둥이 국가원수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의 제거를 위해 전국의 인민을 들쑤셔서 고의적으로 일으킨 “천하대란”이었다. 류샤오치를 모욕주고 매장시키기 위해 마오쩌둥은 촘촘한 그물을 치고 치밀한 덫을 쳤다. 그 덫에 빠진 류샤오치는 “반도(叛徒, 반역 도당), 내간(內奸, 내부간첩), 공적(工敵, 노동자의 적)”의 죄명을 쓴 채 처참하게 무너졌다. 마오쩌둥의 공격은 크게 다섯 단계로 진행됐다.

정적 살해: 마오쩌둥의 무서운 계략

제 1단계는 이념적 밑밥 뿌리기였다. 문혁 개시 3년 전인 1963년 여름 마오쩌둥은 32세의 선전원 치번위(戚本禹, 1931-2016)로 하여금 관군에 생포된 후 “자술서”를 작성했던 태평천국(太平天國)의 충왕(忠王) 이수성(李秀成, 1823-1864)이 “구국의 영웅”이 아니라 “반역자”라는 주장을 펼치게 했다. 바로 그 논리에 따르면, 1936년 국민당이 지배하던 백구(白區, 백색지구)에서 생포됐다가 허위 반성문을 쓰고 풀려났던 61명의 비밀요원들도 반역도당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백구의 북방국 총책 류샤오치가 61명을 탈출시키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00년 전 항복한 이수성을 반역자로 몰아 결국 류샤오치의 목에 반역자의 칼을 씌우기 위함이었다. (<42회> “정의를 위한 투쟁? 본질은 시기, 질투, 탐욕, 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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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 내간, 공적 류샤오치를 영원히 당에서 축출하라!/ chineseposter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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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단계는 책임 떠넘기기였다. 문혁의 광열에 불을 지핀 후, 마오쩌둥은 남방에 머물면서 혼란 수습의 총 책임을 류샤오치에 떠넘겼다. 1966년 5월부터 7월까지 최초의 50일 간 류샤오치는 문혁의 현장에 공작조를 파견해서 과격분자를 진압했다. 이때 화려하게 베이징에 복귀한 마오쩌둥은 “조반유리”라는 한 마디로 류샤오치를 “혁명군중”을 탄압하는 반혁명의 수괴로 몰아갔다. 그 순간 류샤오치는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허리까지 잠기고 말았다.

(<22회> “마오쩌둥과 홍위병의 결합”)

제 3단계는 대중 동원을 통한 직접 타격이었다. 1966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홍위병이 나서서 류샤오치와 그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 1921-2006)를 타격하기 시작했다. 대중의 눈앞에서 국가원수 류샤오치는 반역도당의 수괴(首魁)로 낙인이 찍혀 파멸의 늪 속에 가슴까지 빨려들었다. (<39회> “군중을 이용해 정적을 제거한다.”)

제4단계는 먼지털이식 마녀사냥이었다. 1966년 가을부터 시작된 류샤오치의 뒷조사는 급기야 그해 12월 18일 4인방의 지휘 아래서 이른바 “전안조(專案組, 특별조사단)”가 구성되면서 절정으로 치달았다. 장칭의 지시에 따라 특별조사단은 1920-30년대 및 일제 침략기 400만 건의 문서를 샅샅이 뒤졌다. 반역, 배신, 항복의 죄목을 억지로 찾아내서 류사오치를 단죄하기 위함이었다. 1980년 3월 19일 중공중앙의 통지에 따르면, 전안조의 특별 조사는 그야말로 최악의 인격살해였다.

“[전안조는] 한 편으론 농허작가(弄虛作假, 허위날조), 단장취의(斷章取義, 과장왜곡), 고문과 자백강요 등의 저열한 수단을 써서 견강부회(牽强附會)의 거짓 자료를 동원하고 증거를 위조해서 중공중앙에 보고했다. 또 한 편으론 진상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증언을 억누르고, 핍박에 못 이겨 위증한 사람들의 증언을 여러 차례 뜯어고친 후 1968년 9월 <<반도, 내간, 공적 유소기의 죄행에 관한 심사보고>>를 작성했다.” (중공중앙통지 1980-3-19)

제 5단계는 인신구속과 의료방치에 의한 정치적 살해였다. 1966년 8월 1-12일 거행된 중공중앙 제8기 11차 전회(全會)에서 류샤오치는 실제적으로 권좌에서 밀려났다. 중공중앙에서 그의 서열은 2위에서 8위로 내려갔다. 그해 10월 1일 마지막으로 류샤오치는 국가주석의 지위에서 톈안먼 성루에 올랐다. 이후 그는 정치적 식물로 전락했다. 류샤오치는 은퇴를 자청했으나 마오쩌둥은 조용한 퇴장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공개적 “대비판”을 통해 류샤오치를 죽이는 무자비한 파멸과 생매장의 계획을 착착 진행시켰다. 결국 생애 최후의 1년 동안 류샤오치는 화장실도 갈 수 없고 음식도 씹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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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샤오치를 비판하는 문혁 당시의 포스터 (1967) 위의 작은 글씨: “모든 게 그릇된 사상이다. 모든 게 독초다. 모든 게 소 귀신, 뱀 귀신이다. 모두를 철저히 비판해야 한다. 절대로 그들이 자유롭게 범람할 수 있게 할 수 없다. - 마오쩌둥” 아래 큰 글씨: “대독초 <<수양>>을 철저히 비판하라!” 여기서 “수양”이란 공산주의자의 품성 수양을 강조한 류샤오치의 저서를 의미한다./ chineseposters.net>


인민민주독재가 국가주석을 살해하다

1969년 11월 12일 중국 허난성 카이펑(開封)시 혁명위원회 건물 한 구석. 싸늘한 빈 방 초라한 침상에 눕혀진 전(前)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류사오치는 비로소 숨을 멈췄다. 만 일흔 한 번째 생일을 불과 열흘 앞둔 날이었다. 공식 사인(死因)은 악성폐렴과 당뇨합병증이었으나 사실은 고의적인 의료 방치에 따른 정치적 타살이었다.

1969년 10월, 류사오치를 감시하던 간수(看守)는 해어진 그의 바지를 벗기고는 야윈 몸을 침대 시트에 둘둘 말아 들것에 실은 후, 군용 비행기에 태워 허난성 카이펑으로 옮겨갔다. 곧이어 류사오치를 진료한 의사들이 고급 의료품을 요구했으나 상부는 냉혹하게 거부했다. 류사오치는 결국 그렇게 고의적인 의료 방치의 결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숨을 거둔 방 밖에는 중무장한 2개 분대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넉 대의 기관총까지 거치(据置)된 상태였다. 삼엄한 경계령이 떨어졌음에도 누구도 방에 갇힌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주자파의 우두머리라는 정보만 전해졌을 뿐이다. 주자파란, 자본주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때는 바야흐로 문화혁명의 만조기(滿潮期)! 주자파로 몰리면 곧 파멸이었다. 목숨을 건사한다고 해도 뭇매를 맞고 불구가 되기 일쑤였다. 외상(外傷)이 경미할 경우에도 회복불능의 정신장애를 겪어야 했다.

류사오치의 시신은 이틀 후 어둑어둑한 새벽 어스름을 타고 군용 지프차에 실려서 화장터로 옮겨졌다. 그의 유해(遺骸)는 인민폐 30위안의 상자에 담겨 보관되었다. 유해번호 123, 유해 주인의 이름은 류웨이황(劉衛皇)으로 기재되었다. 여기서 ‘웨위황’이란 황제를 보위한다는 뜻이다. 류사오치는 “죽어서 마오쩌둥을 보위하라!”는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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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1월 12일 카이펑시 혁명위원회 건물에 실려와 감금 상태에서 사망한 류샤오치의 마지막 모습/ 공공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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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참사를 겪고 나서 1978년 베이징 시단(西單) 거리의 붉은 벽돌 벽에는 수많은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자유와 민주주주의 확대를 요구하는 자발적인 시민들의 그 유명한 “민주의 벽 (民主牆)운동”이었다. 1978년 12월, 바로 그 “민주의 벽”에 걸린 한 장의 대자보에는 큰 글씨로 다음 문구가 적혀 있었다.

“대체 류사오치가 무슨 잘못을 했지?”

거의 10년간 그 누구도 입 밖에 내뱉지 못하던 한마디의 질문이었다. “민주의 벽”에 나붙은 바로 그 질문은 류사오치의 복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결국 1980년 2월 최고영도인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 5차 전회에서 “류사오치 동지의 복권에 관한 결정문”을 발표한다. 이 결정문에 따르면, 문혁 당시에 류사오치에게 가해진 처벌은 부당한 박해였다. 또한 “반역자, 배신자, 배반자” 등 류사오치에게 들씌워진 오명은 모두 음해성 누명이었다. 감옥에서 고독하게 숨을 거둔 지 11년 만에 류사오치는 다시금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로 거듭났다.

1989년 톈안먼 대도살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반체제 지식인 옌자치(嚴家祺, 1942 - ) 교수는 묻는다. “왜 국가주석이었던 류사오치는 헌법과 법률의 보호를 받지도 못한 채 반도, 내간, 공적으로 몰려 일체의 재판받을 권리까지 잃어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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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복권된 류샤오치는 1980-90년대 중국 인민폐 100원 지폐 위에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와 나란히 4대 혁명 지도자의 한 명으로 올라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이래 중국의 모든 지폐엔 마오쩌둥 한 명의 초상화만 등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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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 당시 류사오치의 처단을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그 수많은 군중을 생생히 기억하는 중국인들은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때 그 수많은 중국인들이 실제로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류사오치를 그토록 증오하고 경멸했던가? 대기근의 참상에서 중국의 경제를 회복시킨 위대한 공적을 쌓은 바로 그 류사오치를? 왜 당시의 중국인들은 그토록 그를 잔인하게 죽음으로 몰아가야만 했을까? 진정 류사오치는 왜 그토록 무기력하게, 그토록 허망하게 국가주석의 권력을 완전히 박탈당해야만 했을까? 마오쩌둥은 과연 어떤 방법을 써서 류사오치를 제거했을까? <계속>

*본회 ‘인민민주독재가 국가주석을 살해하다 부분'은 졸저(拙著),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 2020), 434-436쪽에서 발췌했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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