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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시대에 맞서 자신을 던진 세 여자, 세 삶의 데자뷔 [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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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여자들의 테러
브래디 미카코 지음·노수경 옮김
사계절 | 324쪽 | 1만6000원

100년 전쯤 ‘미친X’ 취급을 받는 여자 3명이 있었다. 이들은 세상의 잘못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고치려 했지만, 사회는 이들의 지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보단 조롱하거나 가십거리로 여겼다. 기사에 악플을 달거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메시지를 보낼 수 없는 시절이었다. 목숨이 위태로워 병원에 있는 사람에게 “죽을 때까지 실컷 괴로워해라” “너의 의식이 완전히 돌아올 때쯤에는 신과 인간의 법을 어긴 미치광이 같은 광신이 너의 빈약한 뇌에서 사라지겠지”라는 편지가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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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가네코 후미코, 에밀리 데이비슨, 마거릿 스키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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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가족·사회·국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무자격자’ 신분은 도리어 가네코의 힘
박열과의 연애도 황태자 폭탄 테러 계획도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한 자율적인 행위였다

영국에 거주하는 일본 작가 브래디 미카코가 100년 전 여성 3명의 삶을 교차해 서술했다. 일본의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1903~1926), 영국의 여성참정권 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1872~1913), 스코틀랜드 출신 아일랜드 의용군 마거릿 스키니더(1892~1971)다. 이들은 삶의 목표나 활동 반경이 달랐다. 서로 알지도 못했다. 다만 시대의 모순을 예민하게 느꼈고, 이를 고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대의 많은 이들이 이 여자들을 멀리하거나 비판하고 기껏해야 몽상가로 여겼겠지만, 세상은 가끔 이런 여자들에 의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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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대역죄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도발적인 사진은 당대 일본의 스캔들이 됐다. 1913년 6월4일 여성참정권 활동가 에밀리 데이비슨은 앱섬 더비에서 왕의 경주마에 달려들었다. 1915년 남장을 한 마거릿 스키니더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왼쪽부터). 사계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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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가장 생생하게 묘사된 이는 가네코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가네코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아버지는 처제와 도망가 살림을 차렸고, 혼자 남은 어머니는 가네코를 늦은 밤 멀리 심부름 보낸 뒤 남자를 끌어들였다.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에 살던 할머니가 가네코를 데려왔으나, 양녀라기보다는 하녀처럼 키웠다. 금강 변에 선 13세의 가네코는 소맷자락에 자갈을 넣고 자살하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옥중 자서전에서 가네코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아름답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데 감탄해 마음을 바꿨다고 돌이켰다. 비평가 쓰루미 슌스케는 가네코의 소생에서 “사상의 저변에 있는 낙천성”을 읽어냈다.

이 낙천성은 23년의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가네코의 중심을 잡았다. 브래디 미카코는 가네코에게서 ‘탈진실’ 자체를 읽어낸다. 가네코는 국가의 데이터에 기입되지 않은, 사실 이전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가네코는 가족, 사회, 국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무자격자’였다. 무자격은 도리어 가네코의 힘이었다. “내가 나의 행위에 요구하는 모든 것은 자신에게서 나와서 자신으로 되돌아갈 것.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표준으로 할 것. 따라서 나는 ‘옳다’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완전히 ‘자율적’인 의미임을 밝혀둡니다.”

박열과의 연애도 그러했다. ‘사회주의 오뎅’이라는 가게에서 일하던 가네코는 우연히 읽은 ‘개새끼’라는 시에서 극도의 생명력을 느꼈다. 알아보니 조선 출신 날품팔이 청년 박열의 시였다. 가네코는 ‘개 같은 처지에 임금 같은 태도’를 가진 박열에게 배우자나 연인이 있는지, 일본인에 반감을 갖고 있는지 등을 확인한 뒤 단도직입적으로 연애를 제안했다. 가네코는 박열에게 3개 조항(동지로서 동거할 것, 내가 여성이라는 관념을 제거할 것, 한쪽이 사상적으로 타락하여 권력자와 악수하게 되는 경우 즉시 공동생활을 해소할 것)을 제시한 뒤, 곧 동거에 들어갔다. 둘은 “권력에 반역하는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를 품은 자들의 모임”인 ‘불령사’를 조직해 황태자에 대한 폭탄 테러를 계획했다. 물론 테러 장소·일자 등 구체적 계획은 세워지지 않았고, 실제로 폭탄을 들여오지도 못했다.

대역죄로 체포됐지만 가네코는 당당했다. 판사 앞에서 “내가 한 일이나 하려고 한 일이 당신들이 멋대로 만들어낸 법률 따위의 제 몇 조에 해당하는지는 내 알 바가 아니지 않나”라고 답했다. 전향을 권유받았지만 “나는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목숨을 건다”고 되받았다. 사형 선고 후 복역 중 ‘성은’에 의한 감형장을 받았을 때는 곧바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가네코는 수감 3개월 만에 숨졌다. 공식 사인은 자살이었다.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

각료 차에 벽돌 던지고 의회 창문 부수고…
교도소서는 단식투쟁으로 음식 강제 주입 당해
“본적은 교도소, 무서운 게 없다”는 평가처럼
왕의 경주마에 달려든, 죽음마저 저항적이었다

에밀리 데이비슨은 여성참정권 운동을 펼친 영국의 여성사회정치연합(WSPU)에서도 가장 과격파였다. “무서운 게 없는 여자, 본적지는 홀러웨이 교도소”라는 미디어의 평가를 받았다. 여성참정권에 반대하는 각료의 차에 벽돌을 던졌다 체포, 의회 창문을 부수다 체포, 우체통에 방화했다가 체포…. 교도소에서도 데이비슨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단식투쟁을 했고, 온몸이 붙들린 채로 입이 벌려진 뒤 음식 주입을 당했다. 데이비슨은 ‘강간과도 같은 강제 음식 주입’을 49차례 당했다.

가네코가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면, 데이비슨은 사회정치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 가네코와 달리, 데이비슨이 죽는 상황은 오늘날에도 사진과 영상으로 쉽게 찾을 수 있다. 데이비슨은 당대 영국의 인기 이벤트였던 앱섬 더비(경마)로 향했다. 국왕 조지 5세와 메리 왕비, 그리고 수많은 관객이 지켜보는 행사였다. 데이비슨은 WSPU 깃발을 든 채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국왕의 말로 향했다. 오늘날로 치면 F1 레이싱 트랙에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데이비슨은 병원에 당도한 수많은 저주의 편지를 뒤로한 채 사고 4일 뒤 숨졌다.

브래디 미카코는 당대 여성참정권 운동의 리더였던 에멀린 팽크허스트에 대해서는 다소 인색한 평가를 내린다. 팽크허스트가 조직의 계획과 상관없이 독자 행보를 하는 데이비슨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생전 데이비슨을 백안시했던 WSPU는 데이비슨의 장례식은 거창하게 치렀다. WSPU는 팽크허스트가 장례식에 참석하려다가 경찰에 체포된 것조차 ‘또 하나의 비극’으로 선전했다.

■아일랜드 독립 의용군 마거릿 스키니더

영국과 싸우기 위해 영국군 클럽서 사격 훈련
부모의 고향이자 ‘평등’ 약속한 아일랜드 위해
목숨 걸고 부활절 봉기 참여, 폭탄 투하 앞장
병사로 부상당한 유일한 여성으로 기록됐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출신의 수학 교사 마거릿 스키니더는 이 책에서 ‘이과 여자’로 표현됐다. 스키니더의 부모는 아일랜드 사람이었기에, 스키니더는 어린 시절부터 영국에 핍박당한 아일랜드의 현실을 잘 알고 자랐다. 스키니더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이 만든 여성용 소총 클럽에 가입해 저격 훈련을 받았다. 영국군의 의도는 유사시 여성들도 적과 싸우게 하기 위해서였지만, 스키니더는 영국과 싸우기 위해 사격 훈련을 받았다.

스키니더는 1916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일어난 부활절 봉기에 참여했다. 아일랜드공화국 임시정부는 모든 시민의 종교적 자유, 평등한 기회를 보장했다. 모든 성인 남녀의 참정권도 약속했다. 공화국이 남녀평등을 약속했기에, 스키니더 역시 아일랜드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녹색 군복을 입고 맞은편 건물의 영국군 병사에게 총을 쐈다. 사령관은 여전히 여성에게 사격, 폭탄 투하를 맡기기를 주저했으나, 스키니더는 끈질겼다. 결국 스키니더는 영국군이 있던 건물에 폭탄을 투하하기 위해 가다가 총격을 당했다.

봉기 6일 만에 아일랜드공화국 임시정부는 영국군에 패배했다. 스키니더는 가네코, 데이비슨과 달리 살아남았다. 이후에도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여러 방식으로 싸우다 수차례 투옥됐다. 스키니더는 부활절 봉기에서 병사로 부상당한 유일한 여성으로 기록됐다.

누군가는 이들에게 ‘왜 말로 하지 않나?’라고 물을 것이다. 돌아올 답은 ‘말로 하면 들었나?’일 것이다.

한 사람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을 다음 사람 이야기 첫 문장이 이어받는 식으로 전개됐다. 지옥, 죽어도 좋다, 독립, 봉기, 예언, 사나운 개들, 분출 등이 세 여자의 삶을 잇는 키워드다. 객관적 자료와 작가의 주관적 서술이 자연스럽게 혼용된 글쓰기를 보여준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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