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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팀장칼럼] 510조원 투입되는 ‘K-반도체 전략’, 만시지탄 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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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국회를 지배하는 집권 여당은 반(反) 대기업 정서로 규제 법안을 양산하고 있고, 예산은 기획재정부가 틀어쥐고 있는데 산업통상자원부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정부가 510조원짜리 ‘K-반도체 전략'을 발표한 지난 13일 통화한 한 대학 반도체 관련학과 A교수는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때늦은 한탄'이라는 ‘만시지탄'은 기회를 놓친 것이 원통해서 탄식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그동안 업계에서 반도체 투자에 대한 세제 지원과 인력 양성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수차례 건의했지만, 그 때마다 대기업 특혜로 비춰질 수 있어서 곤란하다는 말만 돌아왔다. 반도체 주력 기업이 한국의 유력 대기업인 삼성전자(005930)SK하이닉스(000660)라는 이유로 역차별을 받아온 것이다.”

A교수의 지적은 지난해 기획재정부 주도로 발표된 한국판 뉴딜 계획에서도 확인된다. 2025년까지 160조원을 투입해서 산업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다는 124페이지 짜리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 문서에 ‘반도체’라는 단어는 딱 두 번 등장한다. 이 마저도 반도체 산업 지원책이 아니었다. 사람 투자의 일환으로 언급된 수준이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글로벌 경제를 선도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국가발전전략에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반도체 산업은 빠져 있었다. 반면 데이터댐 등 데이터는 157번, 인공지능(AI) 138번, 그린 115번이 등장했다. 계획을 수립한 공무원들조차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데이터댐 등 추상적인 신산업 구상으로 채워진 한국판 뉴딜에는 구체적인 이행전략이 없다는 비판이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다.

반도체는 스마트폰, TV, 컴퓨터 등 디지털로 된 모든 제품에 들어가기 때문에 ‘산업의 쌀’이라 불린다. 데이터댐, AI 등이 구현될 수록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은 커질 수 밖에 없다. 반도체 산업의 흥망성쇠에 한국의 국운(國運)이 걸려있다. 반도체 경쟁이 세계적으로 격화되면서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웨이퍼를 들고 삼성전자의 투자를 압박했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반도체 전략을 진두지휘 해야 할 이재용 부회장은 수감 생활을 하느라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발표한 ‘K-반도체 전략'으로 SK하이닉스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10년치 용수를 우여곡절 끝에 확보하게 된 사연은 반도체 산업이 겪고 있는 역차별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SK하이닉스는 122조원을 투입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전력망과 광역상수도망을 연결해달라고 정부 측에 요청했다. 그러나 예산 당국인 기재부로부터 ‘수도권 대기업 사업장에 정부 예산을 지원해 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비슷한 상황에서 파운드리 세계 1위인 TSMC를 보유한 대만 정부의 선택은 달랐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가뭄에 따른 물부족으로 TSMC 공장 가동에 차질을 빚자, 벼 농사의 물 공급을 중단시켰다.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을 위해, 정부와 기업, 국민들이 모두 나서 ‘반도체 살리기'에 나선 것이다. 글로벌 반도체 수급난으로 인해 대만 정부의 이런 노력이 언론 보도를 통해 부각되자 기재부는 그제서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물, 전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다.

반도체 업계의 만성적인 인력난도 마찬가지다. 그간 반도체 업계는 관련학과의 정원 상향과 석박사급 인재 양성을 요구해왔다. 이에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반도체 분야 전문인력 3000명을 양성하겠다는 3000억원 짜리 사업을 기재부에 요청했지만,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떨어지면서 예산은 편성되지 않았다. 문제가 공론화 된 이후 정부는 인재 양성 분야 예산을 3500억원으로 500억원 증액해, 다시 예타를 신청했다. 불과 1년 만에 ‘반도체 패싱'에서 ‘반도체 육성'으로 입장을 바꾼 셈이다.

문승욱 산업부 장관은 취임하자마자 반도체 업계와 만나 “반도체 투자 관련 재정·세제·자금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이 약속의 결과물이 ‘K-반도체 전략'이다.

그러나 ‘K-반도체 전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 돼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반도체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미국, 중국, 대만 등 주요 국가들의 경쟁이 점차 치열해지는 상황이다. 과거처럼 투자 걸림돌을 치워달라는 요구를 ‘특정 대기업에 대한 특혜 요구‘로 치부하는 습성이 계속되면, ‘반도체 강국 코리아’의 지위를 유지하는 게 어려워질 것이다.

문승욱 장관의 약속에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여전한 것은 예산과 세제지원을 담당하는 기재부측 반대에 시달린 누적된 경험 때문일 것이다. 이번 전략 발표가 업계의 불신, 정부 당국자들의 고정관념을 모두 바꾸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박성우 정책팀장]

세종=박성우 기자(foxpsw@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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