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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모녀가 지독한 시절을 통과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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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문학동네(2016)

열여섯 살 에이미에겐 오랫동안 간직해온 비밀이 있다. 그녀가 다른 엄마를 원한다는 것. 예쁜 엄마, 사람들을 따뜻이 반겨주는 엄마,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것 같은 엄마를 원했다. 적어도 외진 숲속에, 이 작은 공간에 박혀 사는 엄마는 원하지 않았다. 서른세 살 이저벨에겐 딸 에이미 자체가 비밀이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 엄마가 어떻게 알아요?”라고 원망하는 딸에게 “아이를 혼자 키운다는 게 어떤 일인지 넌 몰라”라고 항변해도, 끝내 ‘하물며 넌 태어나야 할 아이도 아니었어!’라는 결정적인 말은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눌러 삼키는 게 이저벨이 간직한 비밀의 근원이다. 에이미에게 또 한 겹의 비밀이 생기고(소녀는 유부남인 학교 선생님을 사랑한다) 그 비밀이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누설되면서 모녀를 둘러싼 잔잔한 비밀의 자장은 폭력적으로 휘청인다. 그 사건 이후 에이미와 이저벨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러나 강물도 더러운 거품을 싯누렇게 부글거리며 유황 냄새를 풍기는 지독한 그 여름에 에이미와 이저벨은 온종일 붙어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다. 해가 뜨면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고, 퇴근 후에는 방음과 단열이 전혀 되지 않는 작은 집에서 각자의 하루를 마무리한다. ‘더위를 피할 방법도, 서로를 피할 방법도’ 없는 상태에서 모녀는 상대방을 그 누구보다 ‘낯선 존재’ 즉, 타인으로 경험한다.

<에이미와 이저벨>은 구체적인 인물을 통해 어느 시절, 어느 공간의 소역사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데 능수능란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데뷔작이다. 작가는 에이미와 이저벨이라는 두 인물을 통해 태생부터 지독하게 얽혀 있어 ‘분리가 힘든 타인’ 사이인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끈질기게 묘사한다. 장래 희망을 묻는 질문에 에이미는 ‘교사’라고 대답하지만, 그건 사실 엄마 이저벨의 생각이었고, 정작 교사가 되고 싶었던 사람도 이저벨이었다. 에이미가 좋아하는 것은 시다. 침대 밑 구두 상자에는 에이미만 아는 시가 들었다. 그러나 엄마는 시를 좋아하기는커녕 예이츠의 이름을 보고도 ‘이이츠’라고 잘못 발음한다.

사건 이후 이저벨은 딸 에이미가 그동안 자신을 감쪽같이 속여왔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사람들의 비난을 살까 두렵다. ‘그애 엄마는 어디 있었대? 어떻게 엄마가 그걸 모를 수 있지?’ 그러나 이저벨을 가장 압도하는 감정은 놀랍게도 젊고 맘껏 사랑할 수 있는 딸 에이미를 향한 질투이다. 그리고 이 모든 불행이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더듬어보다가 끝내 이저벨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고 만다. 언제나 자신의 불행을 감당하지 못해 쩔쩔맸던 어머니는 어린 이저벨에겐 족쇄와도 같은 죄책감의 근원이었다. ‘그들은 외로웠고, 둘이서만, 그곳에서 고아처럼 살았다.’ 그리고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에이미와 이저벨 역시 유황 냄새보다 지독한 미움과 원망이 부글거리는 마음을 하고서도 ‘서로 찰싹 들러붙어 있었다.’ ‘가정의 달’을 맞은 이 나라에서 이 불행의 대물림을 목격할 때의 기시감은 가장 지독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이 된다.

다르게 살아보기로 결심한 이저벨은 십수 년간 교류하지 않았던 공장의 동료 직원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어느새 친구 두 사람이 생긴다. 각자의 고통과 불행이 폭발한 날, 이저벨은 친구들과 에이미에게 오랫동안 간직해온 비밀을 털어놓고, 홀가분하게 덧붙인다. “내 사촌 신디 레이가 코끼리를 먹는 방법은 한 번에 한 입씩 먹는 거라고 말하곤 했어요.” 한 번에 한 입씩. 에이미와 이저벨이 서로를 이해하게 될 속도를 가리키는 말이리라 해석하고 싶다.소설가, 번역가

한겨레

일러스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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