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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나이팅게일과 같지만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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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다] 메리 시콜

한겨레

메리 시콜 (1805~1881)


영국이 프랑스랑 터키랑 한편을 짜고 러시아와 싸운 전쟁이 크림전쟁이다. 새 무기가 도입되는데 전술은 옛날대로라 많은 사람이 다치고 아팠다. 이때 활약한 사람이 플로런스 나이팅게일이다.

메리 시콜도 있다. 아버지는 백인 군인이고 어머니는 자메이카의 전통 의술 치료사였다. 시콜은 아픈 군인들을 간호하러 가겠다고 자원했다. 그런데 당국은 일손이 부족하다면서도 시콜을 간호사로 뽑지 않았다. “인종차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시콜의 간호를 받고 건강을 회복한 백인이 “유색인종만 아니었다면 더 훌륭한 분이었을 것” 따위의 차별적인 말을 감사의 인사랍시고 내뱉던 시대였다.

차별 때문이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그때 중년이던 시콜은 “나이가 많고 병원에서 일해본 경력이 없었다”고, 나이팅게일 연구자인 린 맥도널드는 지적한다. 이 말도 사실일 것이다. 피부색이 어떠한지를 떠나 그때 당국자들 기준으로 시콜은 문외한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콜이 자메이카의 전통 의술로 사람들을 돌보던 치료사라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서인도제도에서 콜레라와 황열병에 걸린 식민지 사람들을 간호했다. 이 경험을 의료 행위로 인정할 수 있을까 없을까? 이 판단이 식민지에 대한 차별과 관계가 있을까 없을까?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아무려나 시콜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기 재산을 털어 전쟁터로 갔다. 숙박시설을 세우고 그곳을 치료소로 이용했다. 나이팅게일도 만났다. 영국과 동맹국 병사들뿐 아니라 적국 러시아 사람도 간호했다. 평생 사업을 하며 번 돈을 이렇게 써버렸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에 돌아와 가난한 말년을 보내다가 1881년 5월14일에 세상을 떠났다. 한동안 잊혔다가 얼마 전부터 영국에서 다시 주목받는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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