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동 전 총리 별세··· 향년 87세
율사서 정치인 변신 후 내리 6선
노태우 정부땐 장관·DJ땐 총리로
'정치는 重業'··· 타협·대화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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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과 3김(金) 시대라는 격변의 정치 상황에서 통합의 리더십으로 협치를 이끈 ‘정치 거목’ 이한동(사진) 전 국무총리가 지난 8일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
1934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복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초기에는 서울지법 판사와 서울지검 검사를 역임하며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고인이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은 제5공화국 초기인 1981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면서부터다. 그해 11대 총선에서 민정당 후보로 나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민주자유당·신한국당·자유민주연합 등으로 당적을 옮기며 내리 6선을 했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에서는 세 차례나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를 맡으며 정치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고인은 율사 출신답게 논리 정연한 언변과 호탕한 성격으로 뛰어난 친화력을 과시했다. 협상을 할 때도 기회가 오면 단칼에 문제를 해결해 ‘일도(一刀)’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88년에는 내무부 장관을 지냈고 김대중 정부에서는 김종필·박태준 전 총리에 이어 2년 2개월 간 국무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인사청문회를 통해 임명된 총리였다. 대선에도 도전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97년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9명의 후보 중 이회창·이인제 후보에게 밀려 3위에 머물렀고 2002년에는 ‘하나로국민연합’을 창당해 재도전에 나섰지만 역시 인연을 맺지 못했다. 2007년 17대 대선에서는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2012년에는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당선에 힘을 보탰다.
고인은 ‘바다는 어떤 물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해불양수(海不讓水)’를 좌우명으로 삼으며 여야를 뛰어넘는 통합과 협치를 추구했다. 2018년 발간한 회고록 ‘정치는 중업(重業)이다’에서도 타협과 대화의 정치를 강조했다. 특히 노태우 정부 때는 여당 내 강경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6·29 선언과 이후 개혁 입법화·제도화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정치권은 이 전 총리의 별세 소식에 일제히 애도를 표했다. 빈소를 찾은 김부겸 국무총리 후보자는 “(고인은)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대통령을 도와 민심을 수습하고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추모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국무총리로 계실 때 외교통상부 차관으로 근무했는데 모든 일을 시원시원하게 처리하시는데 항상 올바르게 하셨다”며 “공직자로서도 그렇고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고 회고했다.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마음이 넉넉한 통합형 의회주의자셨고, 늘 책을 가까이하셨던 분”이라고 회고했고 같은 당 이명수 의원 역시 “협치의 정치인이었던 고인이 생전 보여준 ‘협치와 통합의 정신’을 기억하며, 평안한 영면을 기원한다”고 애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남숙 씨, 아들 용모(건국대 행정학과 교수) 씨, 딸 지원·정원 씨, 사위 허태수(GS그룹 회장)·김재호(동아일보 사장) 씨가 있다. 빈소는 건국대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11일 오전 7시 10분.
/송영규 기자 sk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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