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연행' 아니라 '징용'이라고 써야"…강제성 물타기
피해자 증언·역사 전문가 연구에서 '강제동원' 양상 드러나
평화의 소녀상 |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본 정부는 '종군(從軍) 위안부'라는 용어 대신 '위안부'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공식 견해를 채택했다.
우익 세력이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국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펼쳐왔던 주장을 사실상 수용한 것이라서 역사 왜곡 시도를 가속할 가능성이 있다.
일본 정부는 "'종군 위안부'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오해를 부를 우려가 있다"며 "단순히 '위안부'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적절하다"는 답변서를 27일 각의(閣議)에서 결정했다고 요미우리(讀賣)신문이 이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아사히(朝日)신문이 한국에서 위안부를 연행했다고 증언한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1913∼2000)의 증언이 허위라고 판단해 2014년 그와 관련된 기사를 취소한 것 등을 고려하면 종군 위안부라는 표현이 오해를 낳을 수 있다고 밝히고서 이런 답변을 결정했다.
이는 바바 노부유키(馬場伸幸) 일본유신회 중의원 의원이 종군 위안부라는 용어에는 군에 의해 강제 연행됐다는 이미지가 담겨 있다고 주장하며 일본 정부가 '종군 위안부' 혹은 '이른바 종군 위안부'를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하며 질의한 것에 대한 답변이다.
'종군 위안부'와 '이른바 종군 위안부'라는 표현은 1993년 8월 4일 일본 정부가 발표한 고노(河野)담화에서 사용됐다.
당시 담화는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마련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고 일본군의 책임을 인정하고서 위안부 동원에 관한 사과와 반성의 뜻을 표명했다.
일본 군부대가 인도네시아에 위안부를 끌고 와 난폭한 수단으로 협박했다는 내용이 담긴 '바타비아(자카르타의 옛 명칭)재판 25호 사건' 문서.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
일본 우익 세력은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희석하기 위해 '종군'이라는 표현을 지우려고 하고 있는데 일본 정부가 27일 답변에서 사실상 이에 호응한 셈이다.
우익 사관을 옹호하는 일본 단체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은 일부 중학교 교과서에 사용되는 '종군(從軍) 위안부'라는 표현을 삭제하라고 교육정책을 총괄하는 문부과학성에 최근 반복적으로 요구해 왔다.
일본은 각의에서 결정된 정부의 통일된 견해가 있는 경우 이를 토대로 교과서를 기술하도록 하고 있으며 우익 세력은 이번 답변을 명분으로 삼아 교과서의 위안부 관련 내용을 수정하라고 압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에서는 종군 위안부라는 표현이 근래에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일본과는 이유가 다르다.
'군대를 따라 전쟁터로 나간다'는 의미의 종군이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됐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을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대신 일본군의 책임을 분명히 드러낸다는 차원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쓰며 줄여서 '군 위안부'로 표기하기도 한다.
우익 단체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2015년 8월 15일 오전 일본 도쿄도(東京都) 지요다(千代田)구 야스쿠니(靖國)신사 인근에서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 왼쪽에서 한 남성이 '고노담화 철폐 서명'을 알리는 표지를 붙이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유엔 보고서는 일본군 위안부를 '성노예'로 규정한 바 있다.
일본 정부는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 출신 노무자를 데려가 강제로 노역시킨 것에 관해서도 강제성을 희석하는 방향의 답변서를 27일 결정했다.
NHK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옛 국가총동원법에 토대를 둔 국민징용령에 의해 징용된 한반도 노동자의 이입(移入·이동해 들어옴)에 대해서는 '강제연행' 또는 '연행'이 아닌 '징용'을 쓰는 것이 적절하다"는 답변서를 각의 결정했다고 NHK가 전했다.
식민 지배를 받는 조선 민중이 일본 측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상황임에도 데려갈 때 강제력을 행사했는지 여부 등에 초점을 맞춰 용어를 구분하도록 한 것은 일제 강점기 노동력 징발의 강제성을 흐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역사 전문가들은 노무 동원·징용이나 일본군 위안부 동원이 당사자에게 사실상 선택의 자유가 없는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며 동원 후의 처우나 업무 등을 속이고 데려간 경우가 많아 강요·약취·납치·유괴·취업사기 등의 양상을 보였다고 지적해 왔다.
동원된 후 의사에 반해 강제 노역을 하거나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은 생존 피해자들이 여러 번 증언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위안부 동원에 관해 '정부가 발견한 자료에는 군, 관헌에 의한 강제 연행을 직접 보여주는 것과 같은 기술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자바섬 스마랑과 바타비아(현 자카르타)에 설치한 위안소와 관련된 일본군 장교와 군무원 등에 대한 전범 재판 기록에는 여성들을 연행에 매춘을 강제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본의 역사 관련 16개 단체는 "강제 연행된 위안부의 존재는 그간의 많은 사료와 연구에 의해서 실증돼 왔다"고 2015년 공동성명까지 발표한 바 있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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