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임 폭락 때 화주의 계약 파기 다반사
적정 운임 유지해야 선·화주 모두 윈-윈
[파이낸셜뉴스]
미국 LA 롱비치터미널에 MSC의 컨테이너선이 접안을 시도하고 있다. 뉴스1 |
치열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상품(서비스)을 구매하는 자는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 하고, 파는 자는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 노력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어느 한쪽이 절대적인 결정권을 행사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공급이 부족할 땐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반대로 공급이 넘쳐나면 가격이 곤두박질치죠.
지난해 벌어진 마스크 대란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전국 국민이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생산량은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웃돈을 주고서라도 마스크를 구하느라 다들 전쟁을 치렀습니다.
美 항만 마비에 해운 운임 폭등
우리 생활과 접점이 부족한 탓에 쉽게 체감하긴 어렵지만, 해운업계에서도 이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선박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면서 운임이 크게 오르고 있습니다.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지난해 코로나19로 교역량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선박회사들이 운항 선박을 대폭 줄여버렸습니다. 하지만 비대면 전자상거래 주문이 폭증하면서 교역량은 되레 늘어나 버렸습니다.
지난 21일 부산 신선대부두에 컨테이너선이 화물을 선적하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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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화물 수입국인 미국의 항만이 셧다운의 영향으로 아직 제 기능을 100% 회복하지 못한 탓도 큽니다. 항만에 접안한 선박이 하역을 신속하게 마친 뒤 부두를 비워줘야 다음 배가 작업을 시작하는데, 이 속도가 크게 느려진 겁니다. 추가 선박을 투입해봤자 항만 바깥에 세워두고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죠.
운임 상승 탓 韓 수출 경쟁력 약화
이같은 현상이 국내 수출 기업에 큰 타격을 입히고 있습니다. 특히 중견·중소기업의 피해가 큽니다. 대기업은 해운사와 장기 운송계약을 맺기 때문에 타격이 덜하지만, 이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운임 상승분을 그대로 떠안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달 10일 작성한 <'컨테이너 박스'가 韓 수출 경쟁력 악화시킨다고? 2021.04.10.>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아래 댓글과 같은 일들이 국내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해운 운임의 급격한 상승이 국내 수출 단가를 끌어올리고 결국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의 경쟁력을 해치고 있다는 내용을 위 기사에 담은 이유였습니다.
포털 다음에 송고된 <'컨테이너 박스'가 韓 수출 경쟁력 악화시킨다고?> 기사에 달린 댓글. 댓글창 갈무리. |
"운임 폭락했을 때 도와준 적 있냐"
하지만 이를 비판하는 내용의 댓글도 많았습니다. 주로 해운업계 분들이 달아주신 내용이었는데요. 요약해보면 "과거 해운 운임이 곤두박질친 탓에 해운업계가 위기에 처했을 땐 도와준 적도 없으면서, 운임이 오르니까 왜 우는소리를 하냐"는 불만입니다. 관련 댓글을 추려봤습니다.
-해운 운임이 쌀 때 국내 기업들 국내 해운사 이용했냐? 해운사 망해가도 다 외면하고 외국 선사만 이용하다가 해운업 망하고 이 꼴 난 거잖아. 왜 그 부분은 선택적으로 침묵하냐?
-해운업 종사자인데 진짜 X소리도 적당히 합시다. 5년 전 2M 주도의 출혈 경쟁할 때 화주 꼬라지가 어땠음? 계약서 다 갈아엎고 운임 후려치고 선복도 후려쳤죠? 근데 지금 공급자 강세 시작되니 뭐요? 수출 가격 경쟁력이 없다? 해운업도 하나의 서비스입니다. 그리고 서비스는 무료가 아니고, 가격이 있습니다. 합당한 대우를 받고프면 이젠 합당한 가격을 지불할 때입니다.
-치킨게임 할 때 국내 해운 사안 쓰고 싼 운임으로 국내 해운사 다 죽여놓고 이제 와서 즐기지 말라고? 무려 10년을 적자보고 살았다. 직원들 임금동결에 주주들 감자에 사채에. 나 참 진짜 이런 X같은 기사 보면 열이 뻗치네
지난 2017년 2월 국내 1위·세계 7위 해운사였던 한진해운 파산으로 부산 신항 한진해운 컨테이너 터미널이 만원상태에 이르자 웅동배후단지 인근에 임시로 컨테이너를 쌓아둔 모습.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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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임 하락에 계약 파기하는 국내 화주들
위 댓글들의 지적은 사실입니다.
해운시장은 보통 6~8년의 불황을 겪고, 1~2년의 호황을 맞이하는 주기를 오갔습니다. 1~2년 바짝 벌고, 나머지 기간을 버텨냈죠. 그러나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머스크라인이 촉발한 치킨게임이 맞물리면서 호황 사이클이 더는 오지 않았습니다. 끝없는 불황의 연속이었습니다. 2016년 한진해운이 파산한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해운업은 이렇다 할 정책적 지원도 화주들의 배려도 받지 못했습니다.
해운업계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국내 주요 화주들이 국적선사를 위해 도움을 주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동일한 운임으로 연간 계약을 해놔도, 운임이 하락하면 계약을 파기해 버립니다. 다른 선사로 가버리죠. 배상금을 물어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앞으로 안 볼 사이가 아니잖아요. 여러 군데 계약을 해둔 다음 가장 싼 곳에 화물을 싣는 경우도 많습니다. 갑자기 못 싣게 됐다고 연락을 받으면 황당할 노릇이죠."
이 관계자는 해외 사례도 설명해줬습니다.
"일본은 화주가 기본적으로 자국 해운사에 먼저 물량을 줍니다. 그리고 계약 맺은 물량의 개수를 무조건 지킵니다. 운임도 계약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지불합니다. 주요 글로벌 화주들도 한번 계약을 맺으면 계약이 종료될 때까지 운임을 내리지 않습니다. 삼성, LG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은 계약을 파기하지는 않지만, 당초 계약한 물량을 줄여버리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최근 10년 간 이런 갑질에 시달린 해운업계 입장에선 '국내 수출 경쟁력 강화를 위해 운임의 변동 폭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거슬릴 수밖에 없던 겁니다.
머스크 라인의 컨테이너선 머스크 센토사가 지난 2018 년 7 월 31 일 영국 리버풀에서 머지 강을 항해하는 동안 예인선의 도움을 받고 있다. REUTERS/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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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업계 "국적선사의 필요성 보여주자"
해운업계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건 아닙니다. 한진해운 파산을 통해 선주-화주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뼈아픈 교훈을 얻은 해운업계가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지난해 해운법이 개정돼 우수선화주인증제도, 부당해운거래신고제도, 운임공표제 등이 도입됐습니다. 화주의 권리를 강화하고 해운사의 부당 행위를 근절하는 제도를 마련한 겁니다.
중견·중소기업들이 수출 선박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손해를 감수하고 대체 선박을 투입하기도 했습니다.
10배 높은 운임을 포기하고 화주들의 화물을 실어 나르기도 했죠. 작년 말 부산-베트남 노선의 운임이 50~100달러에 불과할 때 중국-베트남 노선은 컨테이너 박스 부족 사태로 인해 1000~2000달러로 폭등했습니다. 하지만 고려해운, 장금상선 등 중소컨테이너 선사들은 중국 시장에 눈을 돌리지 않고 국내 노선을 유지했습니다. 국적선사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해운업계가 이처럼 먼저 손을 내민 이유는, 장기계약을 통한 안정적인 운임의 유지를 위해서입니다. 한국해운협회 관계자는 "한진해운 사태 이후로 수년째 선주-화주 협력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계약을 맺자고 제안했다"면서도 "운임이 낮을 땐 화주들이 장기 계약을 맺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운임이 더 하락할 거라고 예상한 화주들이 장기 계약을 꺼렸던 겁니다.
지금은 거꾸로입니다. 운임이 더 오르지 않을까 우려하는 중·소 화주들이 장기계약을 맺자고 먼저 요청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무역협회가 주최한 '2020년 선·화주 간담회'가 작년 9월 2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트레이드타워에서 진행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제공.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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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주-화주 불신의 고리 끊자
운임이 너무 많이 오르면 한국의 수출 경쟁력에 타격을 입습니다. 반면 운임이 너무 많이 떨어지면 국적선사의 경쟁력이 하락합니다. 국적선사들이 힘을 쓰지 못하면 외국 선사들이 횡포를 부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해운업계가 대체 선박을 어렵게 구해 국내 노선에 투입하고 높은 운임을 포기한 채 국내 노선을 유지한 건 바로 국적선사의 필요성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국적선사의 필요성을 느낀 화주들이 해운 불황이 왔을 때 장기 계약을 통해 해운사의 경쟁력을 어느 정도 유지해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입니다.
지난 2016년 해운업 구조조정 당시 해운사들은 "국적선사가 없어서는 안 된다. 화주들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화주들은 "국적선사와 외국선사의 차이를 모르겠다. 호황 때 국내 화주를 신경 써준 적 있냐"고 콧방귀를 뀌었죠. 이런 불신의 고리를 해운업계가 먼저 끊어내고 협력의 관계로 만들어나가겠다는 겁니다.
日 협력 모델 도입해 '윈윈'해야
전문가들은 일본의 선주-화주 협력 모델을 제시합니다. 성결대 한종길 동아시아물류학부 교수(부총장)는 "일본은 장기 운송 계약을 바탕으로 운임이 급격하게 오르거나 떨어져도 일정한 수준에서 유지될 수 있도록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고려대 김인현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지난해 저유가로 인해 선박 연료인 벙커C유 값이 하락했다"며 "일본 선사들은 줄어든 연료비를 운임에 어느 정도 반영해줬다"고 소개했습니다.
한종길 교수는 양측의 협력이 선화주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한 교수는 "(장기 운송 계약을 통해) 국적선사는 장기적인 선복 확장 계획을 세울 수 있고, 화주는 국적선사의 안정적인 계약과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머스크 라인 등 해외 선사와의 협상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HMM 스페인 알헤시라스 터미널(TTIA)에서 CMA-CGM 컨테이너선박이 하역작업을 하고 있다. HMM 제공.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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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fnnews.com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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