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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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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더P] '복당' 당면과제 홍준표, 또 한 번의 대선도전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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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의원 [매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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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 대선주자인 홍준표 무소속 의원은 1953년 경남 창녕군 남지읍에서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은 홍판표(洪判杓).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한학을 공부하다 징용을 다녀왔고 해방 이후엔 별다른 직업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 부모님은 농사를 짓기도 하고 행상일을 하기도 하면서 자식들을 뒷바라지 했다.


의사 꿈 접고 검사의 길

초등학교 6년 동안 다섯 개의 학교를 다녔다. 1학년은 창녕 남지국민학교, 2~3학년은 대구 신천국민학교와 신암국민학교를 다녔다. 이후 다시 창녕으로 돌아와 창녕국민학교를 다니다가 합천 학남국민학교에서 졸업했다. 잦은 이사 때문에 유년시절 친구를 사귈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대구로 가 영남중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자전에세이 ‘나 돌아가고 싶다'에서 중학교 유학은 전적으로 자신의 고집 탓이었다며 그 때부터 가난을 극복하고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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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의원의 고등학교 시절 모습 [홍준표 의원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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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의원의 원래 꿈은 검사가 아닌 의사였다. 영남고에 입학한 그는 2학년으로 올라가며 이과를 택했고 경북대 의대를 목표로 삼았다. 그는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돈도 많이 벌려고" 의사를 선택했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의대는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반대하며 육군사관학교를 추천했고 고등학교 3학년 육사시험에 합격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검사의 길로 접어들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이웃민과 함께 비료를 배급받았는데 급작스럽게 비료 절도범으로 고발을 당했다. 아버지는 누명을 썼다고 억울해 했다. 이 일을 겪은 뒤 '군인보다 검사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고 뒤늦게 문과 공부를 시작해 한달 뒤 고려대 법대에 합격했다.

그는 책에서 "사람 팔자는 한순간에 바뀔 수 있다"며 "만약 육사를 갔었다면…그 귀한 합천 사람을 찾던 전두환을 따라 쿠데타에 가담한 뒤 감옥에 갔을지 모른다"고 회고했다.


방황 끝 사시 합격

1972년 고려대에 입학한 그는 생계를 위해 가정교사 일을 병행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당시 신문에 800원짜리 광고를 내 가정교사 일을 시작했지만 학생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일도 겪었다. 방황하는 1학년 생활을 마친 그는 2학년 등록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독학으로 사법시험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산사에 들어간다. 그러나 아무런 기초지식 없이 홀로 공부하기에 법전은 너무 높은 벽이었다. 결국 1년 만에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1974년 10월 대학에선 유신 반대 운동이 강하게 일고 있었다. 그 역시 친구의 요청으로 유신 반대 운동에 동참했다. 역할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그에게 글재주가 있다는 이유로 유신 철폐를 주장하는 유인물 작성을 도와달라고 했고 그는 친구와 함께 여관에 숨어 격문을 작성했다.

총 세차례 유인물을 작성했는데 같은 글씨체가 반복되자 수사망에 걸려들게 됐다. 그는 유신 반대 격문 뿐만 아니라 그해 12월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때 성금 모금을 위해 학내 격려문을 붙이기도 했는데 격려문의 글씨체와 유신 철폐 격문의 글씨체가 같은 것이 들통난 것. 그는 8시간 동안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는데 운동에 가담한 나머지 인물을 밝히라는 종용을 끝까지 거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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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의원의 고려대 졸업식 당시의 모습 [홍준표 의원실 제공]


본격적으로 사시 수험생활을 시작했지만 수차례 낙방했다. 계속되는 실패에 시험을 포기하고 잠시 철강회사에서 일한 적도 있다. 하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는 1982년 마지막 시험에 도전했고 서른살 나이로 합격한다. 사법시험은 24회, 사법연수원은 14기다. 연수원 동기생으로는 주호영, 김진태 의원,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권순일 전 대법관, 채동욱 전 검찰총장 등이 있다.


'홍준표'로 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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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시절 사무실 안에서 법전을 읽고 있는 홍 의원의 모습 [홍준표 의원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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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홍판표'의 첫발은 1985년 1월 청주지검에서 떼게 된다. 처음 맡게된 사건은 공무원의 부동산 비리 사건이었다. 군청 재무과 직원이 100여평의 국유지를 불법으로 불하했다는 진정서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진정인에게 소환을 요청하자 진정인은 돌연 진정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통상 진정을 철회하면 진정 종결로 처리하지만 그는 쉽게 지나칠 사건이 아니라 생각해 수사과장에게 수사를 지시했고 군청 직원이 연루된 사건임이 확인됐다.

그러나 "검찰이 30여년 봉직해 온 공직자를 뚜렷한 혐의도 없이 소환해 조사하고 있다"는 반발이 들끓었다. 급기야 구명 운동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끝까지 밀고 나갔고 결국 유죄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이 시기에 이름을 '홍판표'에서 '홍준표'로 개명한다. 판단할 판(判)자를 썼는데 당시 청주지법원장이었던 윤영오 판사가 검사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며 개명을 권유했고 평평할 준(準)자로 바꿨다.

이후 울산지청(現 울산지검)을 거쳐 1988년 서울지검 남부지청(현 서울 남부지검) 특수부에 부임한다. 부임 초기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조카와 관련된 사건을 수사했다. 수사 초기 혹시 모를 외압을 의식해 상부에 보고 없이 수사를 해나갔고 결국 자백을 받아냈다.


모래시계 검사

이후 '노량진수산시장 경영권 강탈 사건'을 맡아 전 정권 인사들을 수사한다. 노량진수산시장 경영권 강탈 사건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형인 전기환씨가 청와대를 통해 서울시, 국세청 등을 움직여 시장 소유주를 압박해 경영권을 인수했다는 의혹이 내용이다. 홍 의원은 주임검사였으나 수사에서 배제됐고 수사는 전 씨가 경영권을 인수한 후 횡령 혐의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사건에 관여한 이학봉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은 기소되지 않았고 전 씨만 구속됐다. 그러나 홍 의원은 이후에도 별건으로 수사를 이어갔고 결국 이 민정수석까지 구속했다.

그에 따르면 검찰 내부에선 '통제불능' 검사로 낙인 찍혔고 형사부로 인사가 났다. 1991년엔 광주지검으로 발령받게 된다. 그는 "사표를 쓰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야하는가" 고민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강력부 검사로 부임한 뒤엔 호남 최대 건설 폭력배 조직을 소탕하는 성과를 올린다.

그는 1년 만인 1992년 서울지검 강력부로 자리를 옮긴다. 강력부는 조직폭력 사범 별로 담당 검사를 정했는데 그는 당시 유행하던 슬롯머신 업계를 관리하는 조폭들을 담당하게 되고 이후 슬롯머신 사건 수사를 시작하게 된다.

수사를 통해 '6공화국의 황태자'라 불렸던 당시 박철언 의원을 구속기소 한다. 이외에도 엄삼탁 전 안기부 기조실장 등도 기소했다. 그는 사건과 연루된 검찰 내부 인사들에 대한 수사도 강하게 주장했고 사표까지 내건 끝에 내부 수사에 착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조직에 상처를 줬다는 꼬리표가 붙었고 안기부, 법무부 파견을 거치다 검사를 그만두었다. 그는 책에서 "검사가 되면서 (세상의) 중심부로 왔다고 생각했으나 착각이었다"며 "검사 때도 늘 변방에 있었던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한편 드라마 '모래시계'가 1995년 방영돼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의 검사 시절 일화를 소재로 했다고 알려지면서 '모래시계 검사'라는 별명을 얻는다.


YS 전화로 정치입문

유명세를 얻자 자연스레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이어졌다. 가장 첫 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시 총재였던 새정치국민회의로부터 받았으나 거절했다. 김 전 대통령이 정계 은퇴 약속을 번복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두번째는 민주당에게서 제안이 왔지만 그가 지망하는 지역구에 이미 후보가 있는 상황이었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김 전 대통령은 "문민정부에서 사정 검사를 한 사람이 야당을 갈 수 있느냐"며 신한국당 입장을 권유했다.

홍 의원은 당시 상황을 돌이키면서 "당시 대통령 전화라는 것은 벌떡 일어서서 받았다"며 "'예예예' 대답만 하다가" 신한국당에 입당하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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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후반 신한국당 시절 홍 의원의 모습 [홍준표 의원실 제공]


'정치인 홍준표'의 첫 선거는 1996년 15대 총선이었다. 송파갑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된다. 1999년 3월 정치 생명에 타격을 입는 사건이 찾아온다. 총선 과정에서 선거법을 위반한 혐의가 불거진 것이다. 지역구 선거운동조직에 약 2400만원을 제공한 혐의였다. 그는 의원직 상실 위기에 처하자 자진사퇴했고 대법원 판결 끝에 유죄가 확정돼 결국 의원직 상실과 동시에 피선거권도 박탈됐다.


MB와의 인연


2000년 선거사범에 대한 사면이 결정됐고 2001년 재보궐선거에서 서울 동대문을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된다. 한편 의원직 상실 이후 그는 잠시 미국 유학을 떠났는데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한 뒤 미국에서 머물고 있을 때라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2004년 17대 총선에선 이른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을 뚫고 당선되며 3선에 성공한다. 당선 뒤 이재오, 김문수 전 의원과 함께 국가발전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든다. '친이명박'으로 통한 모임이었다. 이후 2005년 당 혁신위원장을 맡게 되고 당시 대표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갈등한다. 홍 의원은 박 대표를 겨냥해 조기 전대론을 띄우는 등 충돌했다. 끝내 실현되진 않았지만 혁신위 운영 내내 '반박 대 친박' 논란이 이어졌다.

이 시기 3선인 홍 의원은 각종 선거들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쓴 맛을 경험한다. 서울에서만 3선을 한 경력을 바탕으로 2006년 지방선거에선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하지만 경선에서 오세훈 현 서울시장에 밀렸다. 2007년엔 대선 경선에도 뛰어들지만 이명박, 박근혜, 원희룡에 이은 4위로 낙선했다. 낙선 후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했고 대선 국면에선 이 후보를 둘러싼 BBK 의혹의 대책본부장을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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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원희룡, 박근혜, 홍준표 한나라당 경선후보가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상암MDS에서 열린 YTN-TV 합동토론회에서 본격적인 토론을 펼치기전에 보도진에게 손을 모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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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내대표·당대표·경남지사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18대 총선에서 4선 고지에 오른다. 18대 국회 출범과 함께 한나라당 원내대표에 출마해 경선없이 추대됐고 정권초기 당청 관계를 이끌었다. 이후 2011년엔 당대표에 도전해 당선된다.

그러나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주민투표 문제가 불거졌고 이후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하자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대표에 오른 지 5개월 만이었다. 설상가상으로 2012년 4월 치러진 19대 총선에선 동대문을에 도전장을 내민 민병두 민주통합당 후보에 밀려 낙선한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 당시 경남지사였던 김두관 의원이 대선 출마를 위해 지사직을 사퇴해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됐고 이에 도전한 홍 의원은 당선된다. 이후 2014년 지방선거에선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한 김경수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한다. 경남지사로 재임하는 동안 도 재정을 흑자로 전환한 성과를 냈지만 진주의료원 폐업, 무상급식 보조금 지원 중단 등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2016년엔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 받기도 했다. 그러나 2017년 12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다.


‘난세'의 대선후보

2016년 말 국정농난 사태가 불거지면서 홍 의원은 대선주자로 거론되기 시작한다. 그해 12월 말까지만해도 '성완종 리스트' 재판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그는 대선 출마 생각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2017년 2월 항소심 무죄판결 이후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는 판결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양아치 친박들 때문에 새누리당이 갈라졌다"며 친박계에 직격탄을 날렸다.

2017년 3월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이 확정되고 황교안 국무총리도 불출마 선언을 한다. 같은 달 치러진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과반 이상을 득표하며 대선 후보로 선출된다. 한편 비박계는 이미 2016년 말 탈당해 바른정당을 창당한 상황이었고 유승민 의원이 대선 후보로 선출했다. 보수 단일화라는 숙제가 던져졌지만 유 후보와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단일화에 실패한다.

대선 과정에선 논란도 있었다. 그는 2005년 펴낸 자서전 '나 돌아가고 싶다'에 대학생 시절 하숙집 룸메이트에게 돼지흥분제를 구해준 일화를 썼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논란이 됐다.

5월 9일 치러진 대선에서 홍 의원은 24%를 득표해 2위를 기록했다. 비록 패배했지만 정치권에선 탄핵 정국에서 추락한 지지율을 상당 부분 회복했고 탄핵 원인을 제공한 정당의 후보치곤 선전한 결과라는 평이 나왔다.

대선 패배 이후 미국에 머물던 그는 7월 치러진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되며 복귀한다. 그러나 2018년 지방선거에서 압도적 참패를 당하고 또 다시 대표직을 사퇴한다. 야인으로 돌아간 그는 유튜브 채널 '홍카콜라TV'를 개설하고 각종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2020년 21대 총선에선 미래통합당이 대거 물갈이 공천을 단행했고 홍 의원은 공천에서 배제됐다. 홍 의원은 탈당 후 무소속으로 대구 수성을에 출마했고 5선에 성공한다.


야권 ‘이슈' 인물

2021년 4월 현재 정치권에선 야권의 대선주자 후보로 꼽힌다. 가장 최근 조사에서 지지율은 리얼미터(16일) 기준 5.9%, 한국갤럽(13~15일) 기준 2%를 기록 중이다. 비록 한자리수이지만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이은 야권 2위다.

그에게 놓인 당면 과제는 복당이다. 21대 총선부터 재보궐선거까지 김종인 체제가 지속되면서 상황이 여의치 않았으나 지난 7일부로 종인 체제가 막을 내리면서 그의 복당 여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당내에선 의견이 분분하다. 원내대표에 출마한 권성동 의원이나 이준석 전 최고위원 등 공개적으로 복당 필요성을 언급하는 인사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지만 초선 의원들 사이에선 반대 움직임도 있는 상황이다. 대선 주자 선출을 앞두고 야권 잠룡들이 모두 국민의힘 안에서 경쟁을 펼치도록 해야한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그의 '강성보수' 이미지에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도 있다.

홍 의원은 지난 15일 "(복당 문제를) 당과 대립각을 세워 풀어갈 생각은 없다"면서도 "외부 사람도 합당하고, 영입하자고 외치는 마당에 일시 외출했던 자기 집 사람의 귀가도 막는다면 당원과 국민들이 이를 용납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윤 전 총장의 영입이나 국민의당과의 합당 논의가 나오는 상황에서 정작 자신의 복당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최근엔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면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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