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inkyu@pressian.com)]
다음은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등 일본의 지식인들이 지난 24일 발표한 공동논문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의 전문이다.
이들은 일본 중의원 제1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발표한 A4 용지 7쪽 분량의 논문에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경위를 짚은 뒤 한일 양국 정부가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재확인하고 그 합의 정신을 한층 높이기 위해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들은 우선 현 일본 정부를 이끄는 스가 요시히데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 책임을 통감하고 모든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 2015년 12월 위안부 합의 당시 아베 전 총리의 말을 새롭게 문서로 만들어 서명한 뒤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한국 주재 일본 대사를 통해 20명으로 알려진 생존 위안부 피해자에게 그 뜻이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2015년 합의의 핵심부분을 재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2015년 위안부 합의'가 양국 정부 간의 공식 합의였다고 인정한 문 대통령에 대해서는 이 합의에 따라 일본 정부가 화해치유재단에 출연한 10억엔의 사용 내역을 공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일본 정부 출연금 중 생존 피해자 35명에게 각 1억원, 피해자 유족 58명에게 각 2천만원씩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를 공식 발표해 달라는 것이다.
이들은 그다음 절차로 나머지 출연금(5억4천만엔)에 한국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를 위해 재단에 별도로 지원한 100억원(약 10억엔)을 합해 한국 정부가 목표로 하는 '위안부문제연구소' 설립을 위한 협의를 일본 정부와 진행할 것을 제안했다.
이들은 "상황은 역사인식과 외교, 그리고 국민감정과 관련되는 문제입니다. 끈질긴 대화와 외교적인 지혜, 그리고 국민에 대한 설득에 의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라며 한일 정부의 지속적 대화와 외교를 촉구했다. 아래는 논문의 작성자 명단이다.
이시자카 고이치(石坂浩一‧릿쿄대학 교원), 우쓰미 아이코(内海愛子‧게이센 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우치다 마사토시(内田雅敏‧변호사), 오카모토 아쓰시 (岡本厚‧월간잡지<세카이>편집장, 스즈키 구니오(鈴木国夫, 시민연합 메구로‧세타가야 공동대표), 다나카 히로시(田中宏‧히토쓰바시대학 명예교수), 야노 히데키 (矢野秀喜‧조선인 강제노동 피해자 보상 입법을 지향하는 일한 공동 행동 사무국장,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도쿄대학 명예교수)*이상, 성명 '한국은 적인가' 간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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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오른쪽)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8년 2월 9일 강원도 평창에서 정상 회담을 가졌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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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
우리는 2019년 7월, '성명 - 한국은 "적"인가'를 발표하였습니다. 이 성명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에 의해 발동된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비판하고, 한일 기본 조약이나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 일본 정부가 한일 양국 국민을 대립시키는 일을 중단하라고 호소하였습니다.
또한 2020년 9월에는 아베 정권에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정권으로 총리가 교체되었을 때 (한일) 정상회담 개최와 민사 소송인 강제노동자 재판에 (일본) 정부가 개입하지 말고 피고 기업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등을 호소한 '성명-지금이야말로 한일 관계의 개선을'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여러 가지 외교적인 모색에 관한 보도가 있었으되 양국의 교착상태는 변함이 없었으며 정상회담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021년 1월 8일,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한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일본 정부에게 배상을 인정하는 판결을 선고하여 일본 정부가 이에 항의하는 사태가 되었습니다. 일본 외무성은 3월 2일 홈페이지에 새로운 '견해'를 발표하여 다시금 한국 정부를 비판하였습니다.
우리는 일본이 과거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직시하여 성실하게 반성하고 사죄하여 전후의 민주주의, 평화주의를 지키며 나아간다면 한반도 사람들(한국 및 북한)과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이며 양국 국민은 친구로서 서로 협력하여 평화리에 공생하는 관계를 구축할 것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양국 사이에서 대립이나 갈등이 야기되어도 냉정하고 합리적인 대화에 의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현재 상황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바를 아래와 같이 표명합니다.
1.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판결에 대하여
1월 8일의 판결은 이른바 '주권 면제'를 인정하지 않고 일본 정부에게 배상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판결 그 자체에 대해서는 인권은 주권 면제에 우선한다는 국제법의 최근 사상을 반영한 첨단적인 판결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남아공) 더반 회의(2001년) 이후, 식민지 지배에 의해 빚어진 고통과 희생에 대하여 종주국이었던 국가가 사죄하고 혹은 배상을 하는 움직임이 세계 각지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판결은 이와 같은 조류에 파문을 던진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소송을 일으킨 것은 (과거) 일본의 행위에 의해 피해를 입고 지금도 여전히 구제되지 못 하고 있는 피해자들입니다. 정치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 했기 때문에 피해자는 한국에서 재판으로 호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판결에 의해 당장 역사 문제가 해결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황은 역사인식과 외교, 그리고 국민감정과 관련되는 문제입니다. 끈질긴 대화와 외교적인 지혜, 그리고 국민에 대한 설득에 의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 기자 회견 (1월 18일)에서 일본 기자의 질문에 답하면서, '(징용공 판결의 현금화는) 한일 관계에 있어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안부 재판의 판결에는) 솔직히 조금 곤혹스럽다', '(2015년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는) 한일 양국 정부 간의 공식적인 합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말하여 기존의 대응에서 심도 있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원고가 동의할 수 있는 방법을 양국 정부가 협의하고 한국 정부가 그 방안을 가지고 원고들을 최대한 설득하겠다'고도 말했습니다.
한일 관계 개선을 향한 커다란 기회가 눈앞에 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2.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의 청산이란
여기에서 다시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한 것에 대한 일본 정부와 국민의 태도와 각오입니다. (일본) 정부와 국민은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일본에 병합하여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식민지 지배를 강요한 사실을 잊지 않고 그 일을 반성하고 사죄하는 자세를 확립하여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을 병합했을 때, 젊은 시절의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는, '지도 위 조선국에 새카맣게 먹을 칠하며 가을바람 소리를 듣네'라는 시를 읊었습니다. 다쿠보쿠의 조선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다시 한 번 상기하고자 합니다.
화해를 위해서는 외교적인 노력과 정치적으로 매듭지을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문제는 일조일석에 해결하지 않으며, 더구나 가해국 국민은 끊임없는 노력을 계속할 각오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사죄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문제를 논하는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한국은 전후 정치적으로 커다란 전환을 했습니다.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후, 남북으로 분단되어 민족상잔의 전쟁(한국전쟁)도 겪었습니다. 북과의 군사적 대치를 근거로 하는 군사정권을, 유혈이 따른 오랜 운동으로 뒤엎고 민주화를 쟁취한 것이 1987년이었습니다.
일본의 정치적 전환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났습니다. '대일본 제국'은 해체되어 민주주의, 평화주의, 국민 주권의 일본국 헌법 아래 재출발했던 것입니다. 일본은 연합국의 의한 카이로선언의 조건인, '조선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유 독립할 것'을 수용하고 항복하여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고 사죄하기까지에는 미처 이르지 못 하였습니다. 이것이 1965년의 한일 기본 조약에도 반영되었습니다. 그후 1960년대 후반의 베트남 반전 운동과 대학 투쟁을 거치는 가운데 스스로의 역사를 반문하고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파내어서 가해를 자각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3. 일본 정부와 국민은 무엇을 했는가
한국에 민주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여성 단체가 1990년에 위안부 문제를 공공연하게 문제 제기하여 일본 정부에 대하여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여 피해자에 대하여 보상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전쟁 중에 일본군 위안소에 연행되어 일본군 장병에게 성적인 봉사를 강요당한 여성들의 문제는 너무나도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증언은 듣는 이에게 커다란 분노와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일으켰습니다. 증언을 들은 사람은 그 목소리에 답을 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촉구에도 힘입어 내외의 자료를 널리 수집하고 조사한 결과,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 장관 담화를 발표하여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였습니다.
'본 건은 당시 군의 관여 아래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성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이다. …정부는, … 이른바 종군 위안부로서 수많은 고통을 겪고 몸과 마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 사과와 반성의 뜻을 밝힌다.'
이것은 일본군 위안부를 강요받은 모든 피해자에 대한 말이었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식민지 지배로 인한 한반도의 피해자, 시민을 향해 나온 말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이 한반도 사람에 대하여 식민지 지배를 가했던 일본 정부, 국민이 표명한 최초의 사죄였습니다.
전후 50년에 해당하는 1995년 7월,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속죄)' 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재단법인 아시아여성기금을 설립하고 위안부 피해자에 대하여 총리가 서명한 편지, 기금 이사장의 편지와 함께 국민 모금에 의한 위로금 1인당 200만 엔, 정부 자금으로부터 의료 복지 지원 300만 엔 상당을 내기로 하였습니다.
총리의 편지에는 '저는 일본국 내각 총리로서 …이른바 종군 위안부로서 수많은 고통을 겪으시고 몸과 마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으신 모든 분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와 반성의 뜻을 말씀드립니다. …일본국으로서는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면서…과거의 역사를 직시하며 …여성의 명예와 존엄성에 관련되는 여러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같은 해 8월 15일에는 각료 회의의 결정을 가지고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 담화'가 발표되었습니다. 이 안에서 총리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의 여러 국가 국민에 대하여 커다란 손해와 고통을 준' 것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다고 밝혔습니다.
1965년부터 30년이 걸려 일본 정부와 국민의 반성이 드디어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가 일본 정부의 식민지 지배 인식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총리가 '편지'를 내면서 '위로금(속죄금)'을 정부 자금에서 지출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한국의 피해자와 운동단체로부터 큰 반발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여성기금의 사업은 필리핀, 네덜란드에서는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한국과 대만에서는 거부하는 태도가 확산되어 당시의 한국 정부에 등록한 위안부 피해자 중 삼분의 일 이하만이 사업을 받아들인 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기금은 2007년에 해산되었습니다.
4. '한국 병합' 100년을 맞이하여
일본 정부와 국민의 이러한 움직임은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불충분하고 지지부진한 활동이라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해의 역사를 인정하려 하지 않으려는 강력한 보수 정치 세력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전후 민주주의파의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또한 반성과 사죄가 없으면 일본은 아시아와 공생하여 미래를 열어 나갈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는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총리 김대중 대통령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1998)',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 김정일 위원장 북일 평양 선언'(2002)으로 이어졌으며, 한국 병합은 조선 사람들의 '뜻에 반하여' 이루어진 것을 인정한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 담화'(2010)로 이르렀던 것입니다.
아시아여성기금을 비판한 일본의 시민단체는 위안부 문제를 입법에 의해 해결하기 위해 민주당 등 야당 의원과 준비를 진행하여 한국의 시민단체도 이를 지지하였습니다. 2009년에 정권이 교체되어 민주당 정권이 출범하자 '전국 행동 2010'을 결성하여 새 정권에 의한 입법 해결을 위한 운동을 시작했으나 민주당 정권은 그 목소리에 응하지 못하고 막을 내렸습니다.
그 후, 역사수정주의적인 아베 정권이 장기간 계속되어 일본 정부와 국민의 반성과 사죄의 흐름은 한때 멈추게 됩니다. 아베 총리는 '고노 담화'도 '무라야마 담화'도 부정하고,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나 '북일 평양 선언'도 거부하고 싶었으나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베 총리 담화'에서 중국에 대한 침략에 관해서는 반성을 했어도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거나 '간 나오토 총리 담화'를 총리 관저‧외무성 홈페이지에서 삭제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던 것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눈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2011년, 한국 헌법재판소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한국 정부의 부작위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당시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연말의 한일 정상회담에서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에게 위안부 문제에 관한 새로운 조치를 요구했습니다.
이듬해 2월, 일본의 시민사회단체는 해결 방안으로서 '①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의 마음에 와닿는 사죄를 할 것, ②일본 국고로부터 사죄금을 피해자에게 전달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 당시 민주당 정부의 사이토 쓰요시(斎藤勁) 관방 부장관은 한국의 대통령특사 이동관 씨와 비밀리에 협상을 하여 합의에 이르렀으나 노다 총리의 동의를 얻을 수 없어 협상은 무산되었다고 합니다.
2012년 12월,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에서는 아베 신조 씨가 재차 총리로 복귀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해 한국에 탄생한 첫 여성 대통령 박근혜 씨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정상회담의 개최를 거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일 관계는 극히 험악한 대립 상태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2014년 6월, 한일 양국의 시민사회단체는 고노 담화의 계승 발전으로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가해 사실과 책임을 인정하여 사죄하고 사죄의 표시로서 배상금을 지급하고, 진상규명, 역사 교육 등의 후속 조치를 한다는 내용의 새로운 해결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한일 양국 정부 간 협상은 난항했으나 미국의 오바마 정권의 중재와 뒷받침도 있어서 마침내 2015년 11월의 한일 정상회담에서 조기 해결하기로 합의가 도출되어 12월 28일의 한일 외무장관 회담에서 해결안에 합의하여 공동 기자 회견에서 발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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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2월 28일 윤병세 외교장관(오른쪽)과 일본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이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부 협상 최종 타결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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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합의의 근간은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 위안부로서 수많은 고통을 겪으시고 몸과 마음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으신 모든 분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 모든 위안부 할머니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조치를 강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정부의 예산에서 10억 엔이 출연되고 아시아여성기금이 전달한 총리의 편지에서는 (그 때까지) 계속 '도의적인 책임'이라고 말했었던 것을 정부의 '책임'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근간 부분에 덧붙여서 일본 외상은 '이번 발표에 의해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한국 정부와 함께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서로 비난, 비판하는 일은 삼간다'고 하는 추가적인 합의점을 표명했습니다.
이 합의는 한국의 피해자와 시민사회단체로부터 사전에 협의가 없었다는 것과 사죄가 애매모호하다는 것 등을 들어 강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한편, 아베 총리 입장에서 보면 기존의 역사수정주의적인 주장과는 양립할 수 없는 문언의 합의였으며 그 때문인지 문서에는 남기지 않았으며 외무 장관의 회견에서만 발표하는 '이례적'인 공표 방법을 취했습니다.
그 후 일본 국회에서 '총리의 사죄 편지'를 낼 거냐는 질문을 받고 아베 총리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하여(2016년 10월 3일), 피해자와 지원 단체의 반발을 초래합니다.
박근혜 정부는 합의에 따라 2016년 '화해 치유 재단'을 설립하여 생존 피해자에게는 1인당 1000만 엔, 피해자 유족에게는 1인당 200만 엔을, 일본 정부가 출연한 10억 엔에서 지급하기로 하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정식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동 재단은 생존 피해자 47명 중 35명, 피해자 유족 58명에게 사업을 실시할 수가 있었습니다. '금전 지급은 필요 없지만 일본 정부의 사죄의 표시로서 받아들인다'고 말한 피해자 친족의 말이 동 재단의 자료에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5. 피해자의 '마음에 와닿는 성실한 사죄'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일본 정부와 국민이 거쳐 온, '고노 담화'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에 이르는 약 25년의 흐름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우리는 일시적으로 가로막힌 이 흐름을 다시 회복하고 한국과의 대화에 의해서만 해결을 찾을 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2015년의 위안부 합의는 분명히 불만이 남으며 불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지금까지의 역사 인식과 사죄의 흐름을 진일보하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좋은 점을 살려, 보다 더 보충하여 발전시키는 것 외에는 문제 해결의 길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식민지 지배의 역사와 피해자의 분노, 고통과 상처를 직시하고 이에 대처하는 것은 사법 판결을 집행한다고 해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양국 국민의 합의와 화해를 바탕으로 한 공동 작업에 의해 이뤄 내야만 할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피해자의 '마음에 와닿는 성실한 사죄'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가해의 역사를 청산한다는 것은, ①가해자가 가해 사실과 책임을 인정하고 성실하게 사죄하고, ②그 증표로서 금전적인 보상을 하고, ③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문제를 후세에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①, ②과 함께 ③을 성실하게 계속적으로 실행함으로써 ①, ②의 사죄가 진지하다는 것을 피해자와 유족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2015년 12월 28일, 합의가 성립된 후, 아베 총리는 기자단에게 '최종적, 불가역적인 해결을 (전후) 70년의 중요한 시점에서 할 수 있었다. 자자손손, 그 후세에게 계속 사죄하는 숙명을 짊어지게 할 수는 없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발언이야말로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선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하여 외무 장관에게 대변시킬 것이 아니라, 총리 스스로의 목소리로 말하고 스스로 서명한 '편지'를 할머니들이게 전달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더 이상 사죄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피해자 측일 것입니다. 가해자가 역사 문제에 대하여 '불가역적인 해결'은 있을 수 있어도 '최종적인 해결', 즉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1988년 8월, 2차 대전 당시의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소 문제에 대해 공식 사죄, 생존자 1인당 2만 달러의 개인적 보상, 강제 수용과 관련되는 학교 교육을 위한 기금 설립 등을 내용으로 한 '시민자유법'에 서명했습니다.
그리고 조지 부시 대통령(아버지)은, 1990년 10월의 식전에서 9명의 일본계 미국인에게 대통령의 '사죄 편지'와 '2만 달러의 수표'를 직접 전달하고 그것을 시작으로 하여 역사 청산이 진행되었습니다.
'대통령의 편지'에는 '금액이나 말만으로는 잃어버린 세월을 되돌리고 아픔을 수반하는 기억을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완전히 바로 잡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2차 대전 중에 일본계 미국인에 대하여 중대한 정의롭지 못 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바이든 신임 대통령도 취임 후 2월 19일 (1942년에 강제수용의 대통령령이 공포된 날), '연방 정부의 공식 사죄를 재확인한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의 하나…'라고 강제 수용의 역사를 되돌아보았다고 전해졌습니다.
전시의 중국인 강제 연행, 강제 노동 문제에 대하여 2000년의 가시마‧하나오카(鹿島・花岡)의 '화해' 이후, 니시마쓰(西松) 건설의 히로시마‧시나노가와(広島‧信濃川)의 '화해'를 거쳐, 최근에는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화해'가 있습니다.
2016년 6월, 미쓰비시 머티리얼사의 기무라 히카루(木村光) 상무는 베이징에 가서 중국인 피해자(閻玉成씨 86세 등) 간에 '화해'가 성립되었습니다. 그 '화해 합의서' 제1조 (사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일본국 정부의 각료 회의 결정 "중국인 노무자 내지(일본 국내) 이입에 관한 건"에 따라 약 3만 9000명의 중국인 노동자가 일본으로 강제 연행되었다. 당사의 전신인 미쓰비시 광업은 …은, 그 일부인 3765명의 중국인 노동자를 … 수용하여 열악한 조건 아래에서 노동을 강요하였다. 그 사이 722명이라는 많은 중국인 노동자가 사망하였다. 본 건에 대해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종국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바로 고치지 않은 것이 바로 잘못이다", 당사는 이와 같이 중국인 노동자 여러분의 인권이 침해된 역사적 사실을 진솔하고 성실하게 인정하여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한다. … 당사는 당시의 사용자로서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고 중국인 노동자 및 그 유족에 대하여 심심한 사죄의 뜻을 표한다.
상기의 역사적 사실 및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고 동시에 향후의 일본과 중국 양국의 우호적인 발전에 공헌하는 관점에서 본 건의 종국적, 포괄적 해결을 위해 설립되는 중국인 노동자 및 유족을 위한 기금에 금원을 출연한다.
그리고 동사는 사죄의 표시로서 1인당 10만 위안의 화해금을 준비하여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기념비의 건립 비용, 중국으로부터 피해자와 유족을 일본에 초청한 추모 사업 비용 등을 별도로 마련하였습니다.
생존 피해자들은 동사의 '사죄를 성의가 있다고 받아들이고' (화해서 제1조), '우리는 중국인 노동자의 강제 연행을 주도한 일본 정부 및 그 밖의 많은 가해 기업이 여전히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여 사죄를 거부하는 상황 아래에서 미쓰비시 머티리얼사가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사죄하는 자세를 적극적으로 평가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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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 씨가 지난 2018년 10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승소 판결을 받고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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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리의 제안
3월 2일의 일본 외무성의 '견해'는 2015년의 위안부 합의로 인하여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확인하였다'고 밝혔을 뿐이었으며 합의의 핵심인 아베 총리의 사죄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이것으로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진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한일 양국 정부에 대하여 먼저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재확인하고 그 합의의 정신을 보다 높이기 위한 노력을 요청합니다. 스가 총리는 고노 관방장관 담화, 무라야마 총리 담화를 계승하는 정부의 입장에서 2015년 위안부 합의의 핵심 부분을 재확인하여 '정부의 책임을 통감하고 모든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 아베 총리의 말을 다시금 문장으로 만들어 서명하여,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주한 일본대사로 하여금 20명이라 일컬어지는 생존 위안부 피해자에게 그 뜻을 전달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5년 합의를 양국 정부 간의 공식적인 합의라는 것을 인정하는 입장을 표명했으므로 일본 정부가 출연한 10억엔에서 화해 치유 재단이 생존 피해자 35명과 피해자 유족 58명에게 각각 1억 원, 2000만 원씩을 전달한 사실을 보고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 나머지 5억 4000만 엔에 한국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를 위해 치유 재단에 별도로 지출한 백억 원(약 10억 엔)을 합쳐서 한국 정부가 생각하는 위안부 문제 연구소 설립에 사용하기 위해 일본 정부의 협력을 요청하면서 협의할 것을 바랍니다. 그것은 피해자와 그 고통을 잊지 않고 후세에 길이 기억할 수 있는 증표가 될 것입니다.
일본 외무성의 3월 2일 의견 문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미국 글렌데일시에 설치된 소녀상의 철거를 촉구하는 미국 시민의 소송을 일본 정부가 지원하기 위해 미국 연방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다고 밝혔습니다.
고난을 겪은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위령비를 건립하는 것에 대하여 일본 국민의 명예에 상처를 입히고 미일 우호를 훼손한다며 반대하는 의견서를 연방 대법원에 제출하여 패소한 일은 실로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위령비 비문에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면 위안부 문제를 보다 더 잘 연구하여 거기에 걸맞는 인식을 갖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일본국이 가져야 할 입장이어야 할 것입니다.
잊지 않고 교훈을 기억하며 후세에 전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진정한 사죄로 이어집니다.
코로나 사태와 기후 변화 등, 한일, 혹은 동아시아 지역은 함께 손을 잡고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과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미국의 정권 교체로 미중 대립의 양상도 변화의 조짐이 보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한일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성명 보러 가기)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inkyu@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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