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연 국제학술토론회서 발표
“헤이그 협약 인권유린에 해당… 재판받을 권리, 국가면제에 우선”
이탈리아 ‘페리니 판결’에서 피해자를 변호한 요아힘 라우 변호사가 26일 정의기억연대가 주최한 온라인 국제학술토론회에서 발표하고 있다. 정의기억연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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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니는 그때까지도 몸에 새겨진 독일 강제노역의 흔적과 싸우고 있었다.”
올 1월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서울중앙지법 판결의 근거가 된 이탈리아 ‘페리니 판결’에서 독일 강제노역 피해자를 변호한 요아힘 라우 변호사는 루이지 페리니를 처음 만났던 날을 이같이 회고했다. 독일인인 라우 변호사는 2004년 이탈리아 대법원 법정에서 자국 정부를 상대로 “독일 나치 정권의 불법행위가 면제될 수 없다”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헤이그 협약상 위안부 피해자들 재판받을 권리 있다”
지난달 26일 정의기억연대(이사장 이나영 중앙대 교수)가 주최한 위안부 판결 관련 국제학술토론회에 발표자로 참석한 라우 변호사는 “서울중앙지법의 ‘위안부 판결’처럼 한 국가의 법정이 ‘국가면제’에 제동을 거는 것은 시간문제였다”고 밝혔다. 국가면제는 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를 소송 당사자로 삼아 재판할 수 없다는 국제법상 원칙이다.
라우 변호사는 위안부 피해의 경우 명백한 인권 유린에 해당돼 재판 받을 권리가 국가면제에 우선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헤이그 협약은 ‘가문의 명예 및 권리, 개인의 생명과 자유를 존중하라’고 명시하는데 이는 적국 여성들을 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하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라우 변호사는 이탈리아인인 페리니가 1990년대 중반 자신을 찾아와 “독일은 언제 내게 배상을 하나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4년 나치 독일에 의해 끌려가 강제 노역을 했고, 난 죽을 수도 있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라우 변호사는 “처음엔 비현실적이라 생각했지만 페리니가 옳았기 때문에 사건을 맡았다”고 했다.
이탈리아 대법원은 페리니에 대한 독일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지만 국제사법재판소(ICJ)는 2012년 “독일의 국가면제는 인정된다”며 독일의 손을 들어줬다. ICJ 판결 몇 주 후 사망한 페리니는 사망 전 라우 변호사에게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라우 변호사는 ICJ가 국제법의 기본 원칙을 망각했다고 비판했다. 국제법상 전쟁 중인 국가라 하더라도 비전투원을 보호해야 하는데, ICJ는 독일이 이를 위반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 “헤이그 협약에 따라 어떠한 국가도 다른 사람의 법정에서의 권리와 청구권을 파기하거나 유예할 수 없다”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배상을 청구해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유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는 “모든 사람은 법원에 의한 공정한 공개심리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다.
●“다른 나라 법원도 국가면제에 의문 제기해야”
2000년 열린 일본군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 당시 수석검사를 맡았던 우스티나 돌고폴 남호주 플린더스대 법대 교수가 온라인 화상회의로 열린 국제학술토론회에 참가해 발표하고 있다. 정의기억연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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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 당시 수석검사를 맡았던 우스티나 돌고폴 남호주 플린더스대 법대 교수도 이날 토론회에 참석했다. 돌고폴 교수는 “다른 나라의 법원들도 한 국가의 주권에 의해 가해진 해악에 대해 더 신중하게 생각한다”며 “국제법 위반에 대한 국가면제 적용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중국 대만 등 위안부 피해자가 있는 다른 국가의 법원에서도 한국 법원처럼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일본의 배상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국제법정은 2000년 한국 중국 대만 등 8개 피해국이 히로히토 전 일왕 등을 전시 성노예제 운영 혐의로 기소해 유죄 판결이 내려진 민간법정이다.
돌고폴 교수는 또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한 행위에 국가면제를 적용해주면 피해국 국민들의 권리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라며 “법과 정의가 동의어는 아니지만, 국가면제의 장막 너머를 탐색한 한국 법원에 박수를 보낸다”고 덧붙였다.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는 양현아 서울대 법대 교수가 온라인 화상회의로 열린 국제학술토론회에 참가해 발표하고 있다. 정의기억연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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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는 양현아 서울대 법대 교수도 토론회에 참석해 이번 판결이 갖는 의미를 강조했다. 양 교수는 “‘인권 유린 피해자의 재판 받을 권리’를 인정한 이번 판결은 정부가 피해자를 대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피해자들이 정의 실현의 절차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을 알린 신호탄”이라고 설명했다.
양 교수는 또 “일본군 성노예 제도는 ‘식민지성에 기초한 젠더폭력’으로 보아야 한다”며 “이러한 극심하고 복합적인 젠더폭력을 다룰 법정이 거의 존재하지 않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여성 인권 유린은 공식 법 체계의 주변부에 놓였지만 이번 판결은 법적 수단이 쓸모 없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줬다”고 평가했다.
박상준 기자 speak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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