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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이슈 '위안부 문제' 끝나지 않은 전쟁

위안부는 없다? “역사 부정론자들, 30년전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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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잠잠해지는가 하면 다시 반복되는 일본군 ‘위안부’ 관계 정쟁이 있다. ‘위안부는 매춘부라서 성노예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둘러싼 공방이다. 주로 ‘조선인 위안부’가 표적이다. 먼저 역사부정론자들이 도발하고 언론이 이슈화하면 사회는 끓어오른다.

정쟁을 살펴보기에 앞서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는 무엇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고 생각하며 왜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15년간에 걸친 아시아·태평양 전쟁 동안 일본군이 진출했던 대부분 지역에 개설됐던 위안소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다. 일본군 장교나 병사, 목격자들이 위안소 개설이나 이용, 목격 경험들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991년 이후에서야 아시아 지역 곳곳에서 숨죽이고 살던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위안소 안에서 있던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우리 사회는 이를 ‘근절해야 할 전시 성폭력’이라는 틀로 볼 수 있었다.

경향신문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에서 한 시민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교수를 비판하는 손팻말을 목에 걸고 있다. / 강윤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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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절해야 할 전시 성폭력

동시에 1991년 이전의 인식틀을 고수하며 ‘위안부는 매춘부다’, ‘당시 합법적인 공창이어서 일본 정부의 책임은 없다’는 일본의 대응도 나왔다. 그리고 30년이 흐른 지금, 후자의 공세는 더욱 조직적이다. 여기에 한국인·미국인 등도 가세하고 있다. ‘위안부’가 ‘매춘부’이지 성노예 또는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만들고 싶은 미래는 어떤 것일까. 전쟁 기간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여성을 비인간화하고 성을 이용한 것은 잘못된 일이며,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피해를 근절하기 위해 피해실태를 드러내면서 가해 연루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싫은 것일까.

역사부정론자들은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위안부’ 문제의 인식틀을 1991년 이전으로 가져가려 한다. 피해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없던 시기로 말이다. 어떻게 세상을 보는 눈이 30년 이전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그 시각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지, 심지어 30년 동안 그 시각에 동조하는 자들이 이렇게 늘어날 수 있었는지. 우리 사회가 성찰할 부분도 있다.

다시 정쟁 문제로 돌아가자. 우리는 왜 ‘매춘부’라는 언어를 가지고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논하고 있는 것일까. 매춘을 풀어쓰면 ‘봄을 파는 부녀’이다. 여기에 포주를 통해 여성의 성을 사는 남성의 존재는 없다. 또한 매매되는 성을 ‘봄’과 같은 자연에 비유해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는 뉘앙스도 있다. 누군가의 아내와 딸이 되는 존재라는 ‘부녀’라는 말 또한 인격적으로 독립된 여성주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이러한 용어의 문제점을 인식해 2004년 관련 법령을 제정할 때 ‘성매매 방지 특별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언론기사나 학술토론에서 ‘매춘부’ 용어가 그대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일제강점기 공창제는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기 위해 핵심적으로 동원되는 역사적 사례이다. 그때마다 빠르게 공유되는 비판적 입장은 ‘위안부가 공창이 아니다’라는 주장이었다. 주장의 근거가 뭘까. 1873년에 제정돼 20세기 전반기까지 제국주의 일본의 ‘법역’에서 시행됐던 공창제는 어떠한 내용과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무엇이 다른가.

조선총독부 경찰관 강습소의 교수 마쓰다 미치요시(增田道義)의 글 ‘공창제도 및 예창기 자유폐업에 관한 약간의 고찰자료’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조선총독부 경찰기구의 기관지였던 경무휘보 327호(1933년 7월)부터 335호(1934년 3월)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연재됐다.

■피해 여성들의 용기 기억해야

창기 생업 계약 부분을 보면, 어떠한 계약서를 보더라도 업주와 창기의 봉건적 노예관계가 자세하게 쓰여 있다. 이 내용을 알았는데도 창기와 업주는 각각 독립해 자유롭게 일을 했고, 그사이에 인신매매 사실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업주는 예외 없이 창기를 속박해 일을 시켜 거리낌 없이 착취했다. 이것이 인신매매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궤변이나 기망이다. 따라서 국가가 공창제도를 인정하는 것은 결국 국가가 인신매매를 인정한다는 말이 된다. 후쿠미는 “실제를 보면 창기는 마치 업주에게 마구 부려지는 노비처럼 보인다”고 서술했다.

여기서 인용된 후쿠미 다카오(副見喬雄)의 책은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교수가 쓴 <태평양전쟁의 성 계약>에도 인용된 책이다. 마쓰다 미치요시는 법령 형식만으로는 창기를 노예라 하고 창기계약을 인신매매라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하지만 실제로는 어떠한가. 그들은 과거 노예와 다름없는 비참한 삶에 빠져 벗어날 희망도 없다”고 단언했다. 창기들이 법률 지식이 없고, 사회적 봉건 도덕이 있고, 사실상 속박이고, 도주해도 갈 곳이 없고, 관헌의 취급이 업자의 편이라는 실상 때문이다.

근대 공창제가 실제로는 노예제도이자 인신매매 제도라는 당시 경찰관계자의 글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도 참고문헌에서 그러한 내용은 삭제하고 법령 형식상의 계약관계만을 가져와 성매매된 여성의 피해를 부정하고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주장들에 대해 우리 사회는 왜 진전된 대응을 해오지 못한 것일까.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기획하고 제도화한 주체는 일본의 정치권력이다. 그들은 관계성을 삭제한 섹스가 전쟁을 수행하는 병사들의 전투력을 높인다고 판단했다. 기존의 유곽을 이용하거나 민가를 빼앗거나 새로 지어 위안소를 개설했고, 일본인과 조선인, 타이완인, 그 외 아시아·태평양 지역 점령지의 여성들을 병사의 성적 도구로 이용했다. 명백히 반여성적·반인도적 시스템이었다.

일본의 정치권력은 이를 합법적으로 운용했어도, 불법적으로 운용했어도 가해책임이 있다. 그 공권력 하에서 여성들은 합법적으로 성적 도구화돼야 했거나 불법적인 인권침해에 구제를 호소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91년 이후 피해자의 발화로부터 ‘발견’됐다. 따라서 그 해결도 피해자의 관점으로 새롭게 구성된 평화와 인권, 반성폭력의 인식틀 안에서 모색돼야 한다. 그 모색의 길에서 “우리가 겪은 일이 다시 반복돼서는 안 된다”며 사람들 앞에 섰던 피해 여성의 용기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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