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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최동현 기자] # 본국으로 귀국하기 위해 출국 심사를 받는 와중에 자신의 국가에 쿠데타로 인한 내전이 발생했다. 모든 비자와 여건이 정지됐다. 순간 자신의 국적은 소멸됐고 돌아갈 고국도 남을 타국도 사라졌다. 공항 터미널이라는 '무국적' 공간에 홀로 남겨졌다. 그곳에서 그는 생존을 위한 또 다른 삶을 시작해야 한다. 2004년 개봉한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터미널'의 한 장면이다.
# 아프리카의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전쟁을 피해 난민 신청을 한 가족이 있다. 그들은 당면한 문자 그대로의 ‘생존’을 위해 난민 신청을 했지만 통상 이것이 통과되는 데는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그들은 이 긴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는 자신의 고국도 아니고 목적국도 아닌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들이 있는 곳은 난민신청자를 위한 수용소나 대기소 일 수 있고, 불법체류자이자 불법노동자로서 사회 어딘가일 수도 있다.
세계지도를 보면 국가를 구분짓는 경계들이 무수히 많다. 이 구획선은 근대의 산물이자 제국주의와도 깊이 연관돼 있다. 냉전체제가 끝난 이후 세계화 바람이 일면서 이 경계가 금방이라도 지워질 것처럼 보였으나 오히려 모습을 달리한 채 더욱 확산되고 있음을 최근 들어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책 '방법으로서의 경계'는 오늘날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이 경계가 정치·경제·사회적 맥락에서 어떻게 확인되고 있는지를 다룬다. 이 책의 공동저자인 산드로 메자드라와 브렛 닐슨에게 톰 행크스가 '갇힌' 터미널이나 아프리카 난민가족이 머무는 그 ‘어딘가’는 모두 경계에 해당한다. 저자들이 보기에는 이주민들이 본국에서의 위험을 피해 터를 옮기려 시도하는 순간부터 이들의 흐름을 통제하는 경계가 시작된다. 이제 경계는 지도 위가 아니라 공항 입국 심사대에 있다.
경계는 더 이상 선이 아니다. 경계에는 시간과 공간까지 포함된다. 누군가에게는 전자여권으로 10초 만에 통과하는 출입국 심사대가 소말리아의 해변에서 동력선을 타고 지중해나 혹은 황해를 넘는 몇 주 혹은 몇 달의 밀항의 시공간으로 늘어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이 나라의 일원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별 받는 몇 년의 시간이 되기도 하고, 그들이 ‘존재’하는 모든 곳이 되기도 한다.
저자들은 ‘경계 없는 세상’이라는 이미지로는 더는 우리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이 책에 따르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경계는 확산하고 증식하고 있다. 지난 20년의 전지구화는 경계의 감소보다는 오히려 확산을 낳았다. 2019년 멕시코의 ‘불법 이주민’을 겨냥한 트럼프의 장벽이 세워졌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전 세계 각국에서 ‘백신 민족주의’가 부상하고 있다. 오늘날 경계는 굳건 하고 오히려 강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저자들은 ‘경계가 확산하고 있다’는 주장이 민족국가가 귀환하고 있다거나,민족국가가 전지구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주장과는 다르다고 분명히 말한다. 민족국가는 오늘날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고 있고 과거와는 다른 형식을 띠고있다. 현재의 전지구화 과정들의 핵심적 특성 중 하나는 상이한 지리적 스케일이 지속적으로 재형성된다는 점이다. 이런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국경선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구획들이 탐구돼야 한다. 경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저자는 지구를 북과 남, 동과 서로 구분하거나 세계를 1세계, 2세계, 3세계로 나눠 각 국가의 조건들을 평가하는 것은 낡은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분명한 선으로 분할된 지도의 이미지에서 출발해서는 현대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의 가장 부유한 국가들의 대도시 지역들 일부가 '제3세계'적인 조건에 처해 있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저자는 경계의 증식이 지구를 이종적인 시공간으로 끊임없이 분할하고 접합하는 시대에 자본주의의 노동 조직을 특징짓는 분업과 위계들 역시 광범위하게 확산됐다고 주장한다. 특히 4장 '노동의 인물형'에서 돌봄노동자와 금융거래노동자라는 현대 노동의 주체적 인물형들을 분석하면서 이들을 연계하고 분할하는 경계를 밀도 있게 탐구한다.
최동현 기자 ne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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