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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이슈 끊이지 않는 성범죄

‘학폭 미투’ 미지근한 반성에 역풍 맞은 배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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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다영 자매에 당한 추가 피해 폭로
송명근·심경섭 피해자 "사과 느낄 수 없어"
'성적 좋으면 OK' 체육 입시 개선 목소리도
한국일보

지난달 26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여자프로배구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와 서울 GS칼텍스 KIXX 배구단의 경기를 앞두고 이재영(왼쪽)과 이다영이 올스타 선정 트로피를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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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겨울 스포츠로 자리잡아가던 프로배구 V-리그가 스타 선수들의 '학투(학교폭력 미투)'에 휘청이고 있다. 구단들은 가해 선수들 보호를 이유로 자필 사과 등으로 대응했는데, 이를 미온적이라고 본 또 다른 피해자가 추가폭로에 나서거나 피해자가 직접 사과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14일까지 드러난 프로배구 선수들의 학폭 사례는 크게 두 갈래다. 설 연휴 직전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전주 근영중학교 재학 시절 여자배구 흥국생명의 ‘쌍둥이 자매’ 이재영(25)과 이다영(25)으로부터 괴롭힘 당했다는 폭로, 그리고 남자배구 OK금융그룹의 송명근(28)과 심경섭(30)으로부터 중ㆍ고교시절 폭행을 당해 수술 치료까지 받은 뒤에도 고통은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배구계는 물론 팬들의 충격이 큰 상황에서 선수들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구단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이들의 미온적 사과는 역풍으로 이어졌다. 무려 21가지 사건을 나열하며 이재영과 이다영에 대한 피해 사실을 최초로 밝힌 A씨는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가해자들로 인해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토로했는데, 두 선수의 사과 이후 또 다른 피해자가 등장하며 논란은 더 커졌다.

13일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자신을 또 다른 피해자라고 밝힌 B씨는 가해자인 두 선수의 심신의 안정이 이뤄진 뒤 징계를 내리겠다고 한 구단의 대응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면서 “너희(두 선수)의 전 재산을 다 줘도 피해자들이 받은 상처는 하나도 안 없어진다”라면서 “이런 식으로 조용히 잠잠해지는 걸 기다리는 거라면 그 때의 일들을 하나씩 더 올릴 것”이라며 추가 폭로를 예고하기도 했다. 하루 뒤엔 근영중 출신 선수의 부모라고 주장한 인물은 이재영, 이다영 자매의 모친인 배구선수 출신 김경희(55)씨를 언급하며 "딸(이다영)에게 '언니에게 공을 올리라"는 지시도 있었다고 폭로했다. 또 "(사태를 방치한)구단과 대한민국배구협회, 대한체육회 방관자"라고 지적했다.
한국일보

2019년 11월 13일 안산 상록수체육관에서 열린 삼성화재와의 홈경기에 나선 심경섭과 송명근.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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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근과 심경섭으로부터 폭행 당했다는 C씨도 두 선수와 구단의 사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추가로 내놨다. 구단은 13일 “송명근은 송림고 재학 시절 피해자와 부적절한 충돌이 있었고 당시 이에 대한 수술 치료 지원 및 사과가 있었음을 확인했다”고 밝히면서 “피해자와 직접 만나 재차 사과하려고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아 문자메시지로 사죄의 마음을 전한 상황”이라고 했지만 C씨는 이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C씨는 “당시 모든 수술비는 학교에서 지원됐고 ‘일상생활배상책임보험’이라는 보험금으로 가해자 부모님께 150만원의 통원치료비를 받았던 게 전부”라고 밝혔다. 사과 방식에 대해서도 “사과는 가해자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사과를 받는 사람이 원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며 “막무가내 전화로 끝낼 단순한 사항은 아니니 전화를 받지 않았고, 문자로 온 내용에서도 이 글을 내릴 정도의 진심 어린 사과는 느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송명근은 이 반박 이후 자신의 SNS에 직접 사과문을 올리면서 잔여 시즌 경기에 나서지 않겠단 뜻을 전했다. 심경섭도 구단을 통해 잔여 시즌 불출전 의사를 밝혔다.

한국배구연맹(KOVO)과 구단은 전례 없던 폭로에 따른 대응을 고심하고 있다. 선수들 잘못이 명백하고 사회적 파장이 커 무거운 징계가 불가피하다는 사회적 시선 안에서, 반성과 재기의 길은 조금이나마 열어둬야 하는 게 아니냐는 현실론도 고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한 발 더 나아가 운동만 잘하고 좋은 성적을 내면 모든 게 용서돼 온 체육입시 제도 전반을 살필 때라고 지적한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체육교육전공 주임교수는 “과거에 묻혔던 일들에 대한 용기있는 목소리가 나왔을 때, 혹독한 사회적인 질타를 받는 상황이 체육계 인사들에겐 익숙지 않을 것”이라면 “체육입시 제도에 따른 부작용을 들여다보고 제도 개선을 논할 때”라고 조언했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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