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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세월을 원망만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제게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보다 다가올 미래가 더 중요합니다. '빨간 줄'이 없어지고 (일반인 신분으로) 운전면허와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지금이 너무 소중합니다."
지난 15일 충청북도 청주의 한 카페에서 매일경제와 만난 윤성여 씨(54)는 재심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어떻게 지내느냐는 질문에 "홀가분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라면서도 "다가오는 시간을 덤덤하게 살고 싶다"고 소회를 밝혔다.
윤씨는 1989년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무기수로 복역했다. 경기도 화성군에 있는 농기계 공장에서 일하던 그는 그해 9월 인근에서 발생한 박 모양(당시 13세)에 대한 성폭행 및 살인 사건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에 연행됐다.
조사 과정에서 가학적인 수사를 받고 허위 자백을 한 윤씨는 2009년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될 때까지 19년6개월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살았다. 2019년 진범 이춘재의 자백 이후 재심을 청구한 그는 지난해 12월 17일 공판준비기일 두 차례를 합쳐 총 12차례 진행된 공판 끝에 무죄를 선고받으며 32년 만에 살인자 누명을 벗었다.
재심 판결 이후 일상생활에 대해 윤씨는 "극적인 변화는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신상 공개를 결정하고 대중에게 여러 번 노출되면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많이 생겼지만 윤씨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여전히 청주에 있는 자동차 시트 제작 공장에서 밤샘 야간근무와 주간근무를 2교대로 반복하면서 가죽 원단을 다루는 업무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다만 재심으로 얻어낸 무죄는 윤씨가 바라던 '평범한 삶'을 바람이 아닌 현실로 만들었다. 그는 여권 발급을 비롯해 그간 전과자였기 때문에 누릴 수 없었던 국민으로서 권리를 되찾았다. 운전면허증 취득과 중등 검정고시 합격은 그가 바라왔던 평범함을 집약한, 올해의 최우선 목표다. 그는 "면허를 따면 가장 먼저 안성에 있는 어머니 산소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윤씨에게 어머니는 감옥 생활을 견디게 한 힘이었다. 윤씨는 열 살 때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여의었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에 양심을 비추는 거울처럼 품었다고 한다.
그는 "죽더라도 무죄임을 밝혀 떳떳해져야지만 어머니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재심을 청구한 이유도 형사보상금 같은 세속적인 이유가 아니라 오로지 어머니 앞에서 당당해지기 위해서였다"고 강조했다.
윤씨는 한 맺힌 세월을 버티게 한 또 다른 동력으로 신앙심을 꼽았다. 그는 복역 중이던 2005년 세례를 받고 지금까지 계속 천주교 신자로 살고 있다. 세례명은 평생을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보낸 빈첸시오 성인의 이름을 땄다. 그는 "감옥에서 1년6개월 동안 성경 전서를 필사하면서 삶에 대한 태도를 공부했다"며 "신자들에게 후원받은 매달 1만원 안팎의 영치금도 감옥 생활에 큰 힘이 됐다"고 설명했다.
부실 수사로 윤씨에게 억울한 옥살이를 안긴 수사당국과 비극의 원흉인 이춘재에 대한 용서도 신앙심에서 비롯됐다. 그는 "경찰에서 수사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구역질이 난다"면서도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면 결국 내가 죽을 때까지 (분노를) 짊어지고 가야 한다. 지나간 세월은 어떻게 할 수 없는데,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토로했다.
윤씨는 이어 "당시 수사에 책임이 있는 경찰과 검사 그리고 이춘재가 재심 공판에 출석해 증언했기 때문에 재판 결과가 좋게 나왔다고 생각한다"며 "용서하기로 했다"고 심경을 밝혔다. 특히 재심 재판정에서 마주쳐야 했던 이춘재에 대해서는 "(이춘재의) 자백이 없었다면 재심 재판 자체가 열리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코로나19 사태로 모두들 마스크를 써 (이춘재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오히려 경찰의 증언을 들을 때보다 마음이 편했다"고 덧붙였다.
[이진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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