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파크스
1950년대 ‘버스 보이콧’ 운동을 주도한 정치인 로자 파크스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최소한의 보호막이 되어줄 수 있는 “원대하고 획기적인” 법이 정착되는 과정이 민주주의임을 증명해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공공장소 흑인·백인 분리 법 두고
어릴 때부터 ‘부당하다’ 생각 가져
“나의 반평생 동안 미국 남부에는 모든 공공장소에서 흑인들을 백인들과 엄격하게 분리하는 법과 관습이 지배했다. 그 법은 백인들로 하여금 흑인들을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괜찮도록 허용했다. (…) 몽고메리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 양보를 거부한 나의 행동이 남부의 분리주의 법률을 폐지하는 데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로자 파크스는 1913년 미국 앨라배마주의 흑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섯 살 정도가 되었을 때”부터 “우리가 자유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 남부에서는 “KKK가 흑인 거주 지역을 휩쓸고 다니며 교회를 불태우고, 사람들을 폭행하거나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몽고메리에서 백인과 흑인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분리되어야 했다. 전차를 함께 탈 수도, 공공 급수대를 같이 사용할 수도 없었다.
로자 파크스는 공부에 재능이 있었지만, 집안 사정으로 11학년 때 학교를 중퇴해야 했다. 로자는 1932년 12월 미국 흑인지위향상협회(NAACP)에서 활동 중이던 레이먼드 파크스와 결혼한다. 레이먼드는 이발사로 생업을 유지하면서 인권운동가의 길을 걷고 있었다. 결혼 후 로자는 학교에 다시 들어가 1933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몽고메리에서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흑인은 “백 명 중 일곱 명에 불과”한 시절이었다. 로자는 세인트 마거릿 병원에서 조무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1941년에 로자는 공군기지인 맥스웰 필드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 기지는 당시로서는 매우 특별한 직장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군사기지 내 공공장소와 버스에서의 흑백 분리주의를 금지하는 명령을 발표했기 때문”에 로자는 백인 동료들과 함께 버스에 앉을 수 있었다. 로자는 악법 폐지야말로 세상을 가장 빨리 또 확실하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자는 “어릴 때부터 백인들로 하여금 흑인들을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괜찮도록 허용한 법과 관습”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로자는 1943년 12월 NAACP에 가입하고, 몽고메리지부의 간사가 되었다. 흑인에 대한 차별 및 부당 행위를 접수받아 기록하는 업무를 맡았다. 현실은 참혹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싸워야 할 때가 되었다고 믿었다. 투표권부터 도전하기로 한다. 로자는 1943년부터 유권자 등록을 시도했다. “무사히 사무소 안에 들어가는 데 성공해도 등록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전에는 재산을 소유한 흑인만 등록을 해주었다. 내가 등록할 무렵에는 재산을 소유하거나 문해(文解) 시험에 통과한 사람만 등록이 허락되었다.” 시험 결과는 사무소 직원들에게 달려 있었다. “내가 문해 시험에 떨어졌을 리가 없다고 믿었지만 확인할 도리는 없었다.” 1945년에 세 번째 시험에 도전했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사무소를 상대로 소송을 걸 생각”으로 답안을 따로 적어 보관했다. 며칠 후, 로자에게 선거등록증이 도착했다. 로자는 절차가 복잡하고 실패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쉽게 포기해버리는 ‘습관’을 가장 경계했다.
하지만 미국 사회는 점차 폐쇄적인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0년대 말에는 흑인에 대한 백인의 폭력이 훨씬 더 횡행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흑인 병사들은 나라를 위해 싸웠으니 자신들도 백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흑백 분리 체제를 옹호했던 백인들은 “흑인 참전 군인들이 너무 건방져 간다”고 받아들였다. 로자는 사회 분위기가 퇴행적일수록 법적 정의가 실현될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1954년에 미국 연방대법원은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최종판결’을 발표하며, 흑백 분리교육은 평등 이념에 배치되는 위헌임을 밝혔다. 1925년부터 흑백 분리교육 폐지를 위해 싸워온 NAACP는 “대법원 판결이 다른 흑백 분리 관행들, 예컨대 흑백 분리 버스 탑승 제도 등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로자는 분리주의 법 철폐를 위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고심했다. 1955년 여름에 테네시주에서 ‘인종통합: 대법원 판결의 적용 방안’을 주제로 열흘 동안 워크숍이 개최되자, 로자도 사비를 털어 참가했다. 로자는 분리주의 관련 법 폐지와 제도 개선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대법원의 판결이 흑인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1956년 2월22일 몽고메리에서의 ‘버스 보이콧’ 운동으로 체포된 후 보안관으로부터 지문 채취를 하고 있는 로자 파크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1954년 ‘분리교육 위헌’ 판결 계기
‘흑백 분리 버스 탑승’도 개선 결심
버스회사·시장 등은 무관심 일관
흑인들과 ‘승차 거부 운동’ 실행
무엇보다 버스 분리 탑승 제도를 하루빨리 폐지시켜야 했다. “버스 승객의 66% 이상이 흑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 승객은 백인들에게 좌석을 무조건 양보해야 했고, 분리된 채로 이동해야 했다. 로자를 비롯한 NAACP 활동가들은 버스회사와 몽고메리 시장, 시의원들에게 절규하듯 호소했지만, 기득권 세력들은 악법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다. 로자는 시를 기소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소인을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다음으로 로자가 제안한 방법은 승차 거부였다. 약 70%에 육박하는 흑인 승객들이 승차를 거부하면, 버스회사가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승복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은 출퇴근용으로 버스를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승차 거부는 곧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로자는 사회적 약자들이 불평등한 세상과 싸우는 동안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내하는지 잊지 않고자 했다.
로자의 승차 거부 운동은 조금씩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었다. 1955년 봄에 10대 소녀인 클로데트는 백인에게 자리를 비켜주기를 거부했다. 이내 경찰이 달려와서 그녀를 체포했다. 그러나 “일군의 활동가들”은 법정 투쟁 대신 “버스회사와 시 관리들에게 청원서를 제출”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로자는 청원서 제출에 완강하게 반대했다. “손에 종이 한 장 들고 가서 백인들에게 이것저것 좀 해주십사 부탁하는 행위는 결코 내키지 않았다. 그런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나는 내 자신과 약속했다.” 로자가 예상한 것처럼, 시 당국과 버스회사는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어떤 요구도 들어줄 수 없다”는 답변을 귀찮다는 듯이 했다. “흑백분리와 인종차별을 없애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싸움인지 깨달을수록 평등한 사회를 향한 로자의 열망은 더욱 커졌다.
1955년의 로자 파크스. 뒤에는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보인다. |
연방법원 ‘위헌’ 선포로 종지부
1956년 흑백 통합버스 제도 시행
“백인에 자리 양보 거부한 내 행동
법률 폐지 기폭제…상상 못했다”
1955년 12월1일, 로자는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내주라는 버스 운전사의 지시를 끝까지 거부했다. 경찰이 출동해 로자를 체포했다. 로자는 1997년에 출간한 자서전 <나의 이야기>에서 당시 버스 운전사의 폭력적인 명령이 너무나 “지긋지긋해서” 도저히 자리를 비켜줄 수 없었다고 밝혔다. 로자는 구치소로 끌려갔고, 출소하자마자 승차 거부 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언론이 그녀의 뒤를 캐고 흠집을 찾으려 애썼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로자는 “정직하고 청렴하게” 살아왔다는 평가를 얻게 된다. 1955년 12월5일부터 승차 거부 운동이 시작되었다. “흑인들에게도 권리가 있습니다. 흑인들이 버스를 타지 않으면 버스회사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버스 승객의 4분의 3이 흑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체포됩니다.” 시민들은 승차 거부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버스는 텅 빈 채로 운행되었다. 로자는 흑백 분리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과 집행유예 및 벌금을 선고받았다. 진보적인 종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몽고메리의 흑인 인권 운동을 대중화시킬 수 있는 조직을 만들었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MIA(Montgomery Improvement Association, 몽고메리 개선협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킹 목사는 위대한 연설가였다.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쳐 버렸습니다. (… ) 차별당하는 것에, 모욕당하는 것에 지쳤습니다. 억압이라는 잔혹한 발에 밟히고 또 밟히는 것에 지쳤습니다.”
승차 거부 운동은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었다. 로자는 1956년 1월 근무지였던 몽고메리 페어백화점에서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해고된다. 로자는 MIA 활동에 매진했다. 승차 거부 운동이 지속되면서 실직자들이 늘어났고 그들의 생활고도 심각해졌다. 걸어서 출퇴근하는 사람들에게는 여러 켤레의 신발이 필요했다. 로자는 미국 전역에서 생필품을 모아 나누어주는 일을 맡았다. 승리를 낙관하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1956년 2월 몽고메리 경찰은 승차 거부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로자를 비롯해 89명의 활동가들을 체포한다. 이 시기에 프레드 그레이 변호사가 연방지방법원에 버스 분리 탑승 제도에 대한 위헌 심판 소송을 제기하자, 얼마 후 몇몇 백인 변호사들이 승차 거부 운동은 ‘불법’이라고 법원에 제소했다. 1956년 6월, 특별 연방지방법원 재판부는 2 대 1로 버스 분리 탑승이 ‘위헌’임을 선포했다. 6개월 후인 1956년 12월21일에 흑백 통합버스 제도가 시행되었다. 1년 이상 계속되었던 승차 거부 운동을 승리로 이끌어낸 로자는 버스 앞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로자는 분명 새로운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1996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메달을 수여받은 로자 파크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로자는 1963년 연방 시민권법의 통과를 요구하는 워싱턴 대행진에 참석했다. 로자는 “시민권 투쟁에 참여해 온 여성”으로 조세핀 베이커와 더불어 대중 앞에 소개되었다. 1964년 린든 베인스 존슨 대통령은 시민권법을 “밀어붙였다”. “그 법은 흑인들에게 투표권과 공공시설 사용권을 보장했으며, 그 법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을 연방정부가 기소할 수 있도록 명시했다.” 로자는 법에 언제나 관심이 많았다. 1965년 3월1일부터 로자는 변호사 출신의 하원의원 존 코니어스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그곳에서 23년을 근속한 로자는 1988년 퇴직한 후, 저술과 강연 활동을 이어나갔다.
로자 파크스는 2005년 10월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은 로자의 장례식에 참석해 묵직한 추도사를 남겼다. “그녀가 없었다면 저는 국무장관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콘돌리자 라이스는 아홉 살 되던 해인 1963년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KKK단이 일으킨 폭발사고로 친구를 잃은 상처를 안고 있었다.
로자 파크스의 사회적 존재감은 건재하다. 2013년 2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로자 파크스 동상 제막식에서 “그분의 동상을 이곳에 모신 것은 잘한 일”이라고 언급했다. 옳은 말이다. 로자는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악법을 폐지시키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최소한의 보호막이 되어줄 수 있는 “원대하고 획기적인” 법이 정착되는 과정이 민주주의임을 여실하게 증명한 정치인이었다. 로자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영은
성균관대학교에서 논문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쓰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성균관대학교에서 논문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쓰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장영은
▶ [인터랙티브] 그 법들은 어떻게 문턱을 넘지 못했나
▶ 경향신문 바로가기
▶ 경향신문 구독신청하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