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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글로벌포커스] 닫힌 사고, 닫힌 문화의 외교적 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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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한국사회는 화려한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다." 오구라 기조 교토대학 교수가 저서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한 말이다. 오늘날 한국인의 도덕 지향성은 "한반도를 지배해 온 주자학의 '리(理)' 지향성의 연장"이며 한국사회의 모든 갈등은 "기존의 '리'를 놓고 싸울까, 아니면 새로운 '리'로 낡은 '리'를 일소(一掃)할까의 차이일 뿐, 쟁점은 언제나 도덕"이라는 것이다.

세대, 이념, 계층별로 갈기갈기 찢어져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갈 길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 엄중한 외교안보 환경 속에서도 허구한 날 도덕 논쟁으로 지새우고 있는 우리의 정치 현실에 절망하고 있던 필자는 이 책을 읽고 해묵은 수수께끼 하나를 푼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지적처럼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을 지나치게 도덕적 잣대로 재단한다. 도덕 논쟁으로 들어가면 찬성 아니면 반대만 허용될 뿐 중간 지대가 없다.

우리 사회의 이런 특성은 냉철한 국익의 계산이 판단과 행동의 기초가 되어야 할 외교영역에서까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외교정책의 수립과 시행에 관여하는 관료들의 행태에 그런 모습이 보이고, 정책결정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권과 언론, 학계, 시민사회의 문화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좀처럼 외교 정책에 균형과 실리를 추구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남북문제와 한일 과거사 문제, 미·중 사이에서의 외교 현안을 대하는 우리 국민의 인식과 태도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국가의 생존과 국민의 안위가 걸려 있는 외교안보 정책만큼은 정권이 바뀌어도 근간이 흔들릴 정도의 변화는 허용되지 않도록 국론이 통일되어야 한다.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학 교수의 말처럼 우리나라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지정학적 환경"에 처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외교안보 정책이 이분법적 사고의 도덕 논쟁에 휘둘려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그런데 과연 현실은 어떤가? 북핵 문제에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남북협력은 민족적 염원이나 도덕적 당위성만으로는 추동하기 어려운 엄연한 외교적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대북제재가 살아있는 한 워싱턴 경유가 서울-평양 직행보다 지름길이란 걸 짐짓 모른 체하고 있는 건 아닌가? 강제징용 판결 문제로 인한 한일 갈등은 과연 외교적 해결의 길로 가고 있으며, 우리는 진정한 해결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고 있는가? 사실상 손 놓고 있다가 위안부 피해자 판결의 파장까지 감당해야 할 상황이 된 것은 아닌가? 한·미·일 안보협력을 중시하는 조 바이든 신행정부와의 관계에서 이 문제가 어떤 수준의 외교적 부담으로 다가올 것인지는 알고서 대처하고 있는가? 미·중 패권경쟁 속에서 선택을 강요당하지 않을 '원칙 있는 외교'를 위해 우리는 과연 절박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대비하고 있는가? 해법을 찾기 위한 각론은 제쳐놓고, 어느 한쪽을 편들거나 양국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총론적 수준에서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근원적 해답을 안고 있는 우리 사회의 정치 문화적 토양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손 놓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더 늦기 전에 바꾸려는 노력부터 해야 한다. 사회적 담론과 성찰을 통해 변화의 길을 찾지 않는 한 지정학적 환경이 지각변동을 겪고 있는 이 시대에 격랑을 헤쳐 가며 국익을 지켜 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다른 의견도 수용할 수 있는 관용의 공간이 마련되도록 열린 사고로 열린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분법적 사고와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문화적 토양 속에서 자존과 실리와 균형을 추구해야 할 외교가 설 자리는 없다. 이제 지식층이 나서야 한다.

[조태열 전 외교부 차관·주유엔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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