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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2021 신춘문예] 이차원의 사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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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당선작

이차원의 사랑법-박상영론(1)

1. 냉소적 허용

문학적인 것을 규정하는 경계에 반대하여 그 중심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달아나는 실험을 감행했던 2000년대 작가들은 비문학적인 것을 문학의 안으로 들여옴으로써 문학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이 문학의 경계를 끊임없이 두드리고 부수는, 그리하여 문학을 수평적으로 확장하는 작업이었다면, 박상영의 소설은 특유의 무게 없음으로 날아올라 수직의 돌파구를 제시한다. 박상영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래서나 그러나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러거나 말거나”(「대도시의 사랑법」, 228쪽)라는 가벼운 태도로 일관한다. 자신들의 실존도 승인할 것을 요구했던 이전 세대의 작가들과 달리 청년 세대와 그들이 열광하는 작가 박상영은 제도의 승인에 연연하지 않는다. 규범적 사회로의 편입에 번번이 실패하여 경험적으로 무기력해진 측면도 있겠지만, 그것이 더는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의 변화이기도 하다. 기존의 관념에 반기를 들기 위해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와 반발을 문학의 동력으로 삼지 않겠다는 다짐인 셈이다. 이들이 사회 혹은 자기 자신과 응전하는 방식은 ‘냉소적 허용’이다.

냉소적 허용은 기성의 관점에서 늘 도피, 무기력 등의 부정적인 태도로 읽혀 왔으나 청년 세대에게는 수용과 이해의 다른 말이다. 이는 퀴어함을 그저 다양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새 시대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한다. 더불어 이전 세대의 방식을 답습하도록 개조될 것을 강요받았던 데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이러한 징후는 박상영을 위시한 최근 작가들이 서술자와 작가의 분리를 최소한의 독서 덕목으로 여겼던 시대와 결별하고 소설 속 중심인물이 곧 작가 자신임을 전면 표방해버리는 데서 읽어낼 수 있다. 박상영은 작중인물의 이름을 ‘박상영’이라는 자신의 실제 이름을 따서 작명한다. 독자들이 소설의 주인공을 작가이자 실존 인물로 간주하게끔 창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새로이 부상한 ‘1인칭 작가 주인공 시점’(2)이라 불러볼 수 있겠다.

독특한 시점의 등장은 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을 통해 촉발된 논쟁의 영향 아래서 이해해볼 수 있다. 특정년도에 출생한 한 여성의 삶을 수기처럼 서술한 이 소설은 미학적 실효성을 의심받는다. 미학성과 정치성을 대립하는 것으로 인식해 온 문학적 관습에 따라 현실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소설에는 상대적으로 미학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내려왔던 것이다. 이러한 잣대는 유독 퀴어 혹은 페미니즘의 작품에 있어 더 엄격하게 작동한다. 근래의 퀴어·페미니즘 소설이 지속적으로 ‘미학성의 결여’라는 표지로 비판받는 이유는 ‘당사자성 자체도 젠더적 한계를 가진 이들에게는 투쟁해서 얻어내야 하는 것’(3)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작품들에는 미학적으로 훌륭하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뭉툭하다는 지적이 따라다녔다.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 예상한 박상영은 이를 반박하지도 그렇다고 이에 대해 항변하지도 않는다. 다만 1인칭 작가 주인공 시점을 취함으로써 일기나 보고서 같다는 평가절하를 당할 바에야 소설과 일기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미학적으로 옳을 필요가 없고, 인물의 전형성을 의심받을 이유도 없는 작가의 실제 체험으로 오독(誤讀)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인물의 이야기가 왜 필요한가’, 혹은 ‘이런 소설이 정치적으로 올바른가’에 대한 모든 혐의를 작가가 자신의 이름으로 뒤집어쓴다. 그리하여 소모적인 논쟁을 사전에 차단한다. 기존의 잣대로 평가받지 않겠다는, 규범 내의 대립장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겠다는, 가볍고 우아한 탈피다. 이는 새로운 세대에 걸맞은 새로운 미학에 대한 요청이기도 하다. 세대의식을 구현해내는 박상영의 소설의 무게 없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또 어떤 자리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재희」의 ‘나’는 호모라도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이거나 호모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해내는 것이 아니라 “호모라서 핑클 부르면서도 운다 됐냐”(66쪽)며 자신이 게이로서 갖는 특별함을 인정해버린다. 다르지 않으니 편견 없이 똑같이 봐달라는 차별받지 않을 최소한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 다르다. 다르니까 다르게 봐라’라며 더 나아가 차이와 개성도 존재한다고 말해버린다. 박상영 소설의 주인공들은 사회적으로 부여된 모욕적 명칭에 반발하지 않는다. 다만 “독창적 별명 짓기”(「대도시의 사랑법」, 193쪽)를 통해 자신들만이 알아듣는 은어로 새로이 거듭나고자 한다. “독창적 별명 짓기”가 청년 세대가 열광했던 히트송 ‘Nu ABO’의 가사임을 상기한다면, 노랫말에 나타나듯 사랑 공식으로까지 여겨지는 기존의 사랑법을 ‘저항 없이’ 거부하는 데 이들의 특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는 것도 사랑이다’가 아니라 사랑으로 쳐주든 말든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이러하며, 그런 우리를 인간으로 대하거나 말거나 ‘우리는 이렇다’고 표현한다. 이들은 가벼움과 무거움을 이분하지 않으며, 어떤 무거운 삶의 문제든 엄숙주의의 중력을 벗겨 날아가도록 둔다. 이성애 규범의 대안적 목록인 LGBT에 포함되지 못했던 무성애자나 간성(Intersex) 등의 존재들을 수용하기 위해 ‘다른(Other)’의 의미를 가진 ‘LGBTO’라는 할 수 있는 한 충분히 모호한 명칭을 새로이 사용하는 것처럼, A형, B형이 아닌 ‘다른(Other)’ 것을 지향하는 ‘New ABO 세대’는 이렇듯 기존의 규범이 수용하든 말든 자신을 거리낌 없이 표현한다.

“퀴어 된 도리를 다하”(「자이툰 파스타」, (4)147쪽)려는 박상영 소설의 주인공들은 사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승인하든 말든, 자신이 가진 퀴어함에 집중한다. 이들은 게이도 그저 평범한 인간이라는 보편성을 증명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다. 더 나아가 게이들의 공통점에서도 벗어나 ‘자신이 게이로서’ 갖는 특성뿐 아니라 ‘게이인 자신’이 가지는 개성을 뽐낸다. 「대도시의 사랑법」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나’는 동성애 혐오의 가장 큰 기반인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음에도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여 이에 “카일리”(193쪽)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그는 에이즈를 둘러싼 세간의 편견이나 보균자에게 부여되는 부당한 혐오에 대해 반박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만의 HIV를 다른 HIV와 구분하여 사회가 낙인찍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수용한다. 더 중요한 점은 단순히 에이즈라는 질병에 부여되는 부정적 인식에서 벗어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에겐 카일리가 있어. 이건 5년도 넘게 나와 함께 살아온 가족이나 다름없고.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하지. 같은 혈관을 공유하고 같은 양분을 먹고 같은 숨을 쉬고. 그러니까 이건 나야. 또 다른 나. 앞으로도 나일 거고 죽을 때까지 나일 테니까. 그리고 오직 나만의 것이어야 하고…… 나랑 만나고 싶으면 말이야, 그걸 알아둬야 해. 내가 나이며 동시에 카일리라는 사실을 말이야.(「대도시의 사랑법」, 225쪽)

나아가 ‘나’는 그 바이러스가 곧 자신이라고 비약해버린다. 에이즈가 갖는 사회적 의미와 별개로 그 질병이 ‘나’라는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에 주목하는 것이다. 현대적인 방식으로 이해되는 다른 질병들과 달리, 에이즈는 ‘위험집단’의 구성원이 초래한 질병이라는 식의 전前현대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다.(5) 이를테면 동성애자와 같은 타락한 공동체를 질병이 심판한다는 낡은 사고방식이 에이즈에는 여전히 통용된다는 말이다. 이와 반대로 ‘나’는 그 질병을 “오직 나만의 것”이어야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사유한다. 에이즈를 동성애의 부작용으로 보는 상징적인 자리에서 끌어내려 지극히 사적인 영역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섹슈얼리티가 각각의 사람들에게 고유하다”(6)는, 즉 특이하지 않은 섹슈얼리티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새로운 결론을 도출한다.

박상영 소설을 향한 ‘퀴어 지리학’(강지희)(7), ‘퀴어(성) 자체를 재현하는 퀴어’(김건형)(8)라는 논자들의 명명은 퀴어 문학의 자리를 온당하게 설정하고자 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평가가 박상영 소설의 퀴어성을 잘 밝혀주었다면 한편으로 인정투쟁을 멈추는 박상영의 서술 방식에서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가벼움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농담에 가까운 서술방식은 작가 고유의 작법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청년 세대를 가장 잘 반영하는 방법이기에 각광받는 측면이 있다. ‘퀴어 서사를 문학의 본류가 아닌 일시적인 유행으로 치부하지 말아야 한다’(9)는 지적처럼 박상영 소설이 퀴어를 다루고 있다 해서 이성애―남성중심적 주류 문단의 틀에 입각하여 이를 특별하다거나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박상영 소설에 등장하는 퀴어 주인공들을 다시금 보편의 범주로 귀화시켜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를 웃어넘기는 그들의 응전방식에서 역으로 우리 시대의 일상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박상영의 소설은 놀랍지만 낯설지 않은, 친숙해 마땅한 소설이다.

2. 보편과 일반에 대한 농담

박상영 소설의 주인공들은 게이가 아닌 사람을 ‘이성애자’라고 지칭하며 이성애가 갖는 권위를 웃어넘긴다. 동등한 대우를 받고자 그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무심하게 수용해버린다.

미대생 분대원들은 다른 거의 모든 스물세 살의 이성애 남자들처럼 별 대단할 것도 없는 자신의 인생을 잘도 늘어놓았다.(「자이툰 파스타」, 150쪽)

모르는 사회인들이 모였을 때 으레 그렇듯 재밌지도 않은 술 게임을 하고, 궁금하지도 않은 인생사나 연봉 얘기, 이성애 연애담을 서로 공유하고 지랄이었다.(「대도시의 사랑법」, 205쪽)

오감독이 원래 그렇지. 세상에서 동성애를 가장 잘 이용하는 이성애자.(「자이툰 파스타」, 173쪽)〔이하 굵은 글씨는 인용자의 것〕

정상적인 성애의 통칭으로 사용되던 ‘이성애’라는 단어를 동성애자인 ‘나’가 ‘나’와 다른 자들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는데, 이때 모종의 전환이 일어난다. 동성애를 중심으로 한 시각에서 이성애라는 명칭이 쓰이자 이는 동성애와 구분되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전락한다. 이를 통해 이성애가 원형적 섹슈얼리티, 즉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동성애를 소외시키고 분리하려는 의도를 가진 ‘이성애’라는 명칭을 전유하여 오히려 그것이 가진 보편이라는 지위를 박탈한다. 이제 ‘이성애’는 일반적이라는 뉘앙스 대신 ‘동성애자와 다름’을 뜻하게 된다. 비일반의 자리로 밀려났던 동성애자는 중심의 자리를 욕망하지 않고 소외된 그 자리에서 이성애를 호출함으로써 일반적이라고 규정되었던 사랑을 상대화시키는 주체로 거듭난다. 이는 보편, 일반의 자리를 탈환하기 위해 저항하지 않고 기존의 언어를 받아들여 자신들만의 은어로 바꾸어 사용해버릴 때 오히려 그 대단한 잣대가 우스워지는 원리다.

인정투쟁을 관두고 “동성애자의 품격”(「자이툰 파스타」, 191쪽)을 뽐내는 주인공들은 동성애자에게 흔히들 갖는 편견에 시달리거나, 이에 맞서 싸우는 피해자로 설정되지 않는다. 「자이툰 파스타」의 ‘나’는 왕샤가 ‘샤넬 향수에 집착하는 무용과 출신’이라는 터무니없는 근거를 바탕으로 그가 게이가 아닐까 추측한다. 왕샤도 오감독이 술을 못 마시니 게이는 아닐 것이라는, 선입견이 가득한 말을 한다. 게이 주인공들 또한 게이에 대한 고정관념과 그로 인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으며, ‘게이들은 다 그렇다’는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들은 게이스러운 것을 경험적으로 몇 가지 알고 있고, 그런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는 ‘보통의 사람’으로 그려진다. 이때 ‘보통의 사람’은 통상적으로 사회에서 규정하는 정상인, 즉 결격의 사유가 없어 제도의 승인을 받을 만한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결격의 사유가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그리하여 제도에 편입하지 못할 게 명백해 보이지만 특별히 어떤 ‘상(像)’으로는 고정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는 성교(性交)의 영역에서도 적용된다. ‘나’가 동성애자인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여 만든 영화는 ‘과잉 성애화’로 비난받는다. 영화에 퀴어를 등장시킬 때는 “보통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치명적인 지점”(180쪽)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영화계에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당사자성뿐만 아니라 이들의 ‘일상과 현실’ 또한 재차 검증하여 획득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말이다. 동성애를 보편적 사랑의 경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동성애자는 성적으로 문란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성 정체성을 슬프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에 ‘나’는 “남자랑 섹스하는 게 좋아서 욕먹어가며 동성애 하는 건데 왜 울고불고 난리를 쳐대는 건지”(178쪽)라며 난색을 표한다. 가지각색의 모양으로 존재하는 성소수자들은 고통을 감내하는 순교자가 아니기에 금욕할 이유가 없으며 이해받을 요건을 갖추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는 객관적인 인식이다.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이해 가능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 자신이 결코 선택하지 않았던 조건들에 의존하는 상태”(10)가 되어야 하는 인정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세상의 아주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점은커녕 그 어떤 것도 되지 못했다. (…) 동성애자이면서 제대로 동성애를 하지도 못했고 그것도 모자라 이성애자들로부터 마이크 하나조차 제대로 훔치지 못했다. (…) 우리는 웃고 떠들고 술 먹고 섹스하다 죽을 줄이나 아는 동성애자들일 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자이툰 파스타」, 215쪽)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기에 어떤 것으로도 정의될 필요가 없는 게이 주인공들의 세속적인 일상은 수기의 형식으로 가감 없이 형상화된다. 더불어 동성애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나’의 고백을 통해 동성애자들이 늘 이성애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세간의 편견을 깨뜨리고 번번이 실패하게 되는 청년들의 삶까지 생각하게 한다.

소설은 동성애자의 삶에서 청년세대를 아우르는 시대감각을 건져 올리고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성소수자가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람들의 편견을 지적하며 ‘나’와 왕샤는 월드컵 노래방과 샤넬 노래방이 있다면 언제나 샤넬 쪽을 택하는 것이 “게이들의 일상”(「자이툰 파스타」, 189쪽)이라고 말한다. 이성애 규범에 대한 위반으로 낙인찍혀 은폐되었을 뿐, 게이 문화, 게이 사회, 게이들의 공통성이 버젓이 존재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껏 드러난 적이 없어 생소하면서도 특이할 것 없는 게이들의 일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던 게이로서의 보편성을 창출한다. 특수성을 버려야만 이성애가 차지한 보편의 자리로 편입될 수 있다던 기존 사회의 믿음은 게이가 갖는 보편성이 도출되면서 깨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 박상영이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농담과 같은 서술방식은 양력을 지니고 날아올라 일반과 비일반, 특수와 보편의 경계를 저 아래 그어진 작은 선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3. 정상(正常)을 넘기

박상영의 소설은 특수로 치부되어온 영역 내부에 존재하는 경계마저 뛰어넘는다. 작가의 실제 이름으로 보증된 퀴어의 일상을 재현하는 소설은 ‘단지 나로서 살아감’(「대도시의 사랑법」 작가의 말, 239쪽)의 이정표가 된다.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외부의 기준을 문제 삼지 않고 다만 모두 비워냈기 때문에 이 탈아(脫我)적 존재들은 끝없이 가벼워지고 투명해지다 종내에는 무엇이든 통과시킬 수 있게 된다. 어떠한 경계에도 제한받지 않는 공중에서 ‘나’들이 만들어내는 ‘우리’로의 교차적 동일시다.

그 시절 우리는 서로를 통해 삶의 여러 이면들을 배웠다. 이를테면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대화는 언제나 하나의 철학적 질문으로 끝났다.

―우리 왜 이렇게 태어났냐.

―모르지 나도.(「재희」, 45~46쪽)

헤테로 여성과 호모 섹슈얼 남성인 ‘나’가 연대하는 「재희」의 서사는 퀴어와 페미니즘의 간극을 경쾌하게 뛰어넘으며 이 둘이 포개질 수 있도록 한다. 재희가 여성이므로 남성인 ‘나’는 상대적으로 젠더 권력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는데 반대로 재희가 이성애자라는 점에서 동성애자인 ‘나’는 재희보다 약자가 된다. 이처럼 복잡하게 얽힌 권력 담론에 대해 그들은 숙고하지 않는다. 다만 여자로 사는 것도, 게이로 사는 것도 “거지 같다”는 소수자로서의 감각을 공유한다. 이는 퀴어와 페미니즘의 차이와 각각이 지나온 역사를 가뿐하게 무시해버리고 불쾌한 경험들이 빈번하게 생긴다는 큰 틀에서 서로 공감해버리는 가벼움이다. 이 가벼움은 “왜 이렇게 태어났냐”는 자조적이고 비관적인 질문보다 “우리”라는 헐겁지만 단단한 결속에 방점을 찍게 한다. 소설은 정상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안락한 삶을 누려 마땅한 남성인 ‘나’와 이성애자인 재희, 즉 “우리”가 각각 게이, 여성이라는 이유에서 핍박받는 삶을 살게 되는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온 ‘정상성(正常性)’ 또한 구축된 허구라는 점을 폭로한다. ‘정상의 권위를 차지하는 자’라는 뜻의 신조어 ‘정상인’(normate)(11)이 제기되었듯, 정상의 지위 또한 구성되고 조작된 위치임을 분명히 한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를 ‘우리’로 퉁치고 연대하는 재희와 ‘나’의 공통점은 ‘정조 관념이 희박하다 못해 아예 없는 편’(14쪽)이라는 점이다. 주변화된 집단에 있는 여성과 동성애자는 흔히 무성애자로 규정되고, 조금이라도 성적인 욕망 내지 행동을 보이면 그것은 과잉 성애로 해석되어 버린다.(12) 그런 의미에서 가공된 ‘정상’의 범주에 속할 수 없는 재희와 ‘나’의 성생활은 극도로 억압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비난받아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나’와 재희는 실제 성생활에 관계없이 각각 ‘더러운 똥꼬충’(34쪽), ‘쉬운 여자’(13쪽)로 내몰리는데 이들은 이러한 문제 앞에서도 특유의 가벼움을 유지한다. 재희와 ‘나’는 ‘자신들의 헤픈 육체를 마음껏’(14쪽) 이용하는 것으로 과잉 성애라는 낙인을 부수지 않고도 뛰어넘는다.

재희는 몰래카메라범에게 스토킹을 당하고, ‘나’는 섹스를 했던 남자에게 아웃팅 협박을 당하지만 서로 도와 위협을 해결해나간다. 이러한 범죄를 당하는 이들은 “밤새 만난 남자들의 정보를 공유”하고 “실컷 남자들 흉을”(14쪽) 보며 순결한 피해자의 자리를 욕망하지 않음으로써 그 자리로 고정될 것을 거부한다. 여성의 성생활을 옥죄는 데 가장 유용하게 기능하는 ‘임신’ 또한 이들은 ‘세포이자 이물질을 떼어내기 위해 그냥 병원 가면 되는 일’(29쪽)로 생각하며 여성의 성적(性的) 윤리와 조금도 결부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숭고한 성전으로 표상되어온 여성의 몸이 단지 재희라는 개인의 육체일 뿐임을 거대한 담론 없이도 드러낸다.

그러나 공깃돌처럼 가볍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웃어넘기는 재희와 ‘나’에게도 대립하게 되는 계기가 생긴다. 재희는 남자친구에게 동거인인 ‘나’가 여자라고 거짓말한다. 남자친구의 추궁 끝에 재희는 룸메이트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실토하고 만다. 재희가 화가 난 남자친구에게 변명처럼 덧붙이는 말은 룸메이트인 ‘나’가 게이라는 사실이다. 이때 모순이 발생한다. 재희의 남자친구는 여자친구가 다른 남성과 동거한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재희는 룸메이트가 동성애자이기에 섹슈얼한 관계가 아님을 입증할 수 있다며 항변하는데, 두 입장 모두 용인 가능하다는 점이다. 재희와 ‘나’의 서사를 알기에 그들에게 친밀함을 느껴 공감하고 있는 독자들은 재희를 비난할 수도, 그렇다고 일반적이라고 여겨질 만한 반응을 보이는 재희의 남자친구를 지탄할 수도 없는 입장이 되어버린다. 사회적으로 승인 가능해 보이는 두 입장은 대립 아닌 대립을 통해 좀 더 내밀한 지점을 밝혀낸다. 이 명명하기 난감한 자리는 반대로 명명의 병폐를 드러낸다. 성적 접촉이 결여된 남녀의 동거는 룸메이트 관계로 보기는 어렵지만, 또 한편으로 승인받아 마땅하다는 점에서 ‘섹슈얼리티와 재생산 가능성’만을 기준으로 합법적인 공동체를 규정해 온 기이한 규범에 오히려 반문하게 한다.

이는 나아가 결혼 제도와 친족 관계까지 의문시한다. 재희의 연애로 흔들리던 둘의 관계는 결국 재희의 결혼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놓인다. 재희는 결혼이라는 합법적인 제도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나’와의 관계를 부정해야 한다. 그들 사이의 내밀한 결속과 감정적 교류는 ‘우정’의 선으로 축소돼야 하며, 둘의 관계는 “피가 섞이지 않은 남매”(56쪽)나 ‘섹슈얼한 관계일 리 없는 이성애 여성과 동성애 남성의 홈 쉐어’ 정도로 변환되어야 한다. 그런 치환 없이는 용인 받을 만한 가능성조차 없다. 재희의 결혼 이후에 홀로 남은 ‘나’는 무효가 된 관계를 어떤 식으로 사유할지 혼란스러워한다. 언제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영원할 줄 알았던 ‘나’와 재희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 났기 때문이다. 결혼 관계에 근거하지 않은 친족 유대를 세우려는 시도는 불법적이고 존속 불가능한 것이 된다.(13) 결혼이 친족을 구성하는 독점적 방식인 이상 ‘나’와 재희의 관계는 인정받을 수도 지속될 수도 없어 그 효력을 잃는다. 명백히 실재하던 관계가 어떤 절차도 없이 폐기되어 버렸을 때, 이 사회에서 배운 언어로는 처리하지 못하는 감정이 남게 된다. 재희와 내가 주고받았던 블루베리 봉지와 말보로 레드 한 갑만이 실물의 증거로 남아있고 이를 통해 환기되는 형용할 수 없는 감각들은 유령처럼 떠돌 뿐이다. ‘나’가 느끼는 상실감은 그들의 관계가 명명될 수 없다는 점에서 ‘개인이 가질 수 없는 감각’(14)이기에 아웃팅으로 인한 분노로 왜곡되어 표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기이한 잣대로 인해 박살 나버린 관계 앞에서도 분노로 일관하지 않는다. 화를 내야 할 상황에 누구보다 크게 웃는 버릇을 내세워 그저 결혼제도를 반대하는 “안티 메리지 운동”(59쪽)을 하겠다며 웃어넘긴다. 이때 전위 아닌 전위가 일어난다. 사회에서 동성애 결혼을 불법이라고 규정 지었기 때문에 동성애자의 권리 신장을 위해 이를 합법화할 것을 주장하는 흐름이 이어져 왔다. 결혼을 ‘못’ 한다는 불가능성은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가능태로 넘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동성 간의 결혼을 금지하자 이에 반대하기 위해 결혼을 욕망하는 전제에 동의하게 되어버린 셈이다. 상당히 윤리적이고 인도주의적으로 보이는 동성애 결혼 합법화에 대한 주장과 운동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당면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국가와 사회가 강압하는 전제를 받아들이게 되어버리는 아이러니에는 이토록 교묘한 정치성이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모순의 굴레마저도 벗어던진다. ‘나’는 “한국사회에서 남녀가 한 가족으로 합치는 것이 얼마나 좆같은지”(58쪽)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며 비혼주의를 결심해버린다. 자신이 결혼을 ‘못’ 하는 것과 별개로 결혼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제도의 실상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상징적인 실천을 ‘안’ 하겠다는 의지 부정의 형태로 결혼제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점점 견고해지는 결혼의 위상까지 유쾌하게 비웃는 주인공은 제도의 내부와 외부에 관한 논의가 실은 뚫린 천장을 고려하지 못한 탁상공론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4. 수직으로 날아오르기

명백히 존재함에도 승인될 수 없어 무자비하게 삭제된 관계를 담담하게 서술한 작가는 나아가 정상이라는 범주 안에 있는 가족관계 또한 상상된 허구임을 입증한다. 그는 혈연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합법적인 가족관계가 얼마나 많은 불법을 묵인하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럭 한점 우주의 맛」에서 엄마는 친아들인 ‘나’를 남자와 키스했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킨다. 여러 검사를 거쳐 아들인 ‘나’는 억압적인 엄마로 인해 “전쟁 피해자와 같은 강도의 트라우마”(98쪽)를 갖게 되었다는 진단을 받는다. 「세라믹」에 등장하는 엄마 ‘은주씨’는 아들인 ‘나’에게 물리적 폭력까지 행사한다.

그러나 정신과 치료를 받아 마땅한 ‘엄마’(「우럭 한점 우주의 맛」)는 자신이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막무가내 논리로 의사의 치료 권유를 거부하고, 엄마 ‘은주씨’의 학대는 “아이를 자립심이 강한 아이로 키우고자”(「세라믹」, 313쪽) 하는 노력으로 미화된다. 정상적이고 안정된 가족관계로 보아 마땅한 엄마-아들의 관계에서 행해지는 폭력이 오히려 그 정상 범주 속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은폐되어왔음이 드러난다. 아들을 학대로부터 지켜낼 의무가 있는 엄마는 오히려 자신이 합법적인 가족이라는 점을 악용하여 아들에게 행사하는 폭력을 정당화할 권리를 얻는다. 두 소설은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의 병폐를 형상화하여 정상 가족에 대한 맹신에 물음표를 달아 이를 미지(未知)의 영역으로 견인한다. 느낌표가 아니기에 부러지지 않는 곡선의 질문은 탄력적이다. 강력한 비판이나 반론이 아니기에 오히려 아무런 반발에도 부딪히지 않는 물음은 앎의 영역에 굳건히 자리매김해온 가족제도를 ‘아직 알지 못함’으로 돌려놓는다. 사회 안정에 기여해야 할 가족 제도가 안정으로 둔갑한 병폐적인 관계들에 적절한 도움이 개입하지 못하게 하는 모순을 품고 있음을, 소설은 우리로 하여금 단지 알아가도록 한다.

또한 생산성을 중심으로 한 가족제도가 동성애, 무성애 이외에도 난임, 불임을 가진 이성애자들에게 비정상의 낙인을 찍게 되는 문제도 함께 제시한다. 술자리에서 먼저 집에 가보겠다는 ‘미자’를 만류하며 ‘왕샤’는 “걸핏하면 집에 가버리고, 못생긴 애나 싸지르는 더러운 이성애를 결사반대”(「자이툰 파스타」, 187쪽)한다고 폭언한다. 이는 아이를 낳거나 입양할 수 없는 동성애자가 자신의 처지를 감안하여 상대적으로 출산이 가능해 보이는 이성애자를 두고 한 농담이지만, 2년째 난임 클리닉을 다니고 있으며, 얼마 전에 유산까지 한 미자는 울먹이게 된다. 언어폭력을 당한 미자와 폭언을 한 왕샤는 놀랍게도 대립하지 않으며 서로 부둥켜안고 운다. 이는 생산성이 결여된 동성애자와 난임의 여성이 비정상성이라는 동일선상에 놓인 채 차별과 폭력을 견뎌왔기에 가능한 공감과 연대다. 박상영의 소설은 복잡하게 얽힌 모든 문제 앞에서 어떠한 벽도 돌파하지 않고 그저 수직적으로 날아올라 수많은 규범과 제도가 모순을 품은 환상적 체계일 뿐임을 조망할 수 있게 한다.

충돌을 감내하는 투사(鬪士)가 되기를 중단하고 한없이 가벼워지는 일. 이는 벽을 벽으로 인식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를 보편, 정상과 더불어 ‘문학적’이라는 기존의 잣대에까지 적용해볼 수 있다. 기존의 경계가 과장해 온 무게와 권위를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을 때, 문학성을 구분하는 경계는 높은 벽이 아니라 단순히 2차원에 머무르는 선이 된다. 금 밟기 놀이를 하듯 그 선 위로 소설을 올릴 수도 있고 선을 밟지 않고 마음껏 날아올라 공중에 문학을 지을 수도 있다. 당사자성을 향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작가의 실명(實名)으로, 실존으로 써내려간 수기이자 일기 같은 소설이 미학성에 대한 어떠한 논쟁에도 휘말리지 않고 자유로이 현실로 날아드는 방식이다. 이러한 가벼움은 청년 세대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이들에게만 독점적으로 향유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을 시발점으로 전(全) 세대가 존재의 가벼움을 긍정하고 냉소적 허용에 동참할 때 비로소 우리는 어느 자리든 가능해지고 어느 자리든 문학적일 수 있으며 어느 자리든 허용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

<끝>

(1) 이 글은 현재까지 발간된 박상영의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문학동네, 2018)와 「대도시의 사랑법」(창비, 2019) 두 권을 대상으로 한다. 이하 소설 제목과 쪽수만 밝힌다.

(2) 이는 2020년에 문제 제기된 김봉곤 작가의 ‘사적 대화 무단 인용’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강동호(「비평의 시간-김봉곤 사건 ‘이후’의 비평」, 「문학과 사회」 2020 가을호, 416쪽)의 의견처럼 작가가 작품에 사적 텍스트를 무단 인용할 가능성을 미리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부재한다. 이는 비윤리적인 무단 인용이 문제시되어야 하며, 김봉곤이 퀴어 작가로 호명 받았다는 이유에서 이를 퀴어 소설, 혹은 1인칭 작가 주인공 시점의 소설이 낳는 폐단으로 연관 지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은 오히려 기존의 남성 작가들이 실제 여성이나 약자들의 삶을 예술이라는 명분을 방패 삼아 전시해오던 관행과 결부되어 비판받아 마땅하다. ‘1인칭 작가 주인공 시점’이라는 필자의 명명과 이것이 가진 문학적 가능성에 대한 서술은 김봉곤 작가의 무단 인용 사건을 옹호하는 서술이 아님을 이를 통해 간략하게나마 밝혀둔다.

(3) 장은정, 「죽지 않고도」, 백지은 외 공저, 「문학은 위험하다」, 민음사, 2019, 98쪽.

(4)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의 경우 줄여서 「자이툰 파스타」로 표시한다.

(5)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이재원 옮김, 이후, 2002, 179쪽.

(6) 미미 마리누치, 「페미니즘을 퀴어링!」, 권유경·김은주 옮김, 봄알람, 2018, 74쪽.

(7) 강지희, 「멜랑콜리 퀴어 지리학」,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해설, 창비, 2019, 310~335쪽.

(8) 김건형, 「2018, 퀴어 전사―前史·戰史·戰士」, 「문학동네」 2018년 가을호, 378쪽.

(9) 김건형, 「소설의 젠더와 그 비평 도구들이 지금」,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9년 가을호, 41쪽.

(10)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135쪽.

(11) 로즈메리 갈런드 톰슨, 「보통이 아닌 몸」. 손홍일 옮김, 그린비, 2015, 20쪽.

(12) 전혜은, 「장애와 퀴어의 교차성을 사유하기」, 전혜은·루인·도균,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 여이연,2018, 43쪽.

(13)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조현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 17쪽.

(14) 테오도르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김유동 옮김, 길, 2019, 94쪽.

[성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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