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국가 건설의 시대 1945~1950』
인적, 물적 자본 없던 대한민국, 미국도 큰 관심 갖지 않아
애국심, 민족주의 등 이념 자원을 끌어 건국 기틀 만들었다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들은 하루빨리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아우성이었고, 유럽을 중시했던 미국 정부 역시 어떻게 하면 소련과의 협상을 빨리 마무리하고 '중요치 않은' 이곳에서 철수할 수 있을지만 고민했을 뿐이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48년 7월24일 중앙청에서 한복을 입고 취임사를 읽고 있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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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간된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국가 건설의 시대 1945~1950』이 그린 1945년 해방 이후 남한의 상황이다. 이 책은 해방 전후사에 대해 널리 자리 잡은 통념을 전복하는 도발적인 책이다.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를 비롯한 수정주의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이 한반도를 반공의 보루로 삼기 위해 민족국가 수립을 억누르고 분단을 획책해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반공-남한 단일 정부를 세우도록 전개했다. 또 이렇게 들어선 대한민국(제1공화국)은 친일파, 반민족적 자본가, 경찰 등 공권력으로 구성된 파시즘 국가로 규정한다.
하지만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국가 건설의 시대 1945~1950』을 쓴 이택선 충남대 사회과학연구소 교수연구원은 이같은 이론을 반박하면서 '취약국가'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1948년 들어선 대한민국은 민중을 착취할 자본가 계급도 발달하지 않았고, 좌익이 중심이 된 각종 폭동을 진압하기에도 버거운 '취약국가'였다는 것이다. 통념과 달리 미국의 지원도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한 주장을 펼친 저자와 26일 서면 인터뷰를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국가 건설의 시대 1945~1950』 [사진 미지북스] |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국가 건설의 시대 1945~1950』을 쓴 이택선 충남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교수연구원 [사진 이택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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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건국된 대한민국을 '취약국가'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일제강점기에 한반도를 통치한 일본의 인적·물적 자본이 해방과 함께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국가를 건설하고 통치하는데 필요한 자본이 거의 전무한 상황이 된 것이다. 게다가 남한은 서양처럼 근대 국가건설을 주도할 부르주아가 존재하지 않는 '취약국가'였다. 그래서 토지개혁과 적산불하를 통해서 부르주아를 육성하는 것이 제1공화국과 이승만의 정책이었다. 따라서 해방 직후 남한에 공산주의의 관점에서 마땅히 타도돼야 할 악질 반동에 가까운 부르주아나 유산계급이 대규모로 존재했다고 보기 어렵다. 당시 상황은 너무 가난해서 혁명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또 한반도는 제국주의의 주요 대상이 되는 천연자원이 풍족하지도 않았고 미국의 세계 전략에서 중요성이 큰 지역도 아니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지원 계획도 없었다.
-비슷한 상황인데 북한은 친일파도 적게 기용되고, 건국 과정도 안정적이었다.
=한국이 북한보다 더 취약했던 이유는 후견인 역할을 하는 미국이 소련보다 국가건설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의 품위 있는 철수를 지향했던 미국과 달리 소련은 한반도를 중시해 북한의 국가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소련계 북한인들을 대거 파견했고 경제건설 계획안을 작성해 줬다. 또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토지개혁 추진, 군대 건설 등 남한보다 빠르게 국가건설을 추진했다. 소련이 미국보다 한반도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경찰과 통역원, 영관급 장교들에게 지급한 봉급이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예를 들어, 1945년 9월 당시 한국 경찰의 봉급은 3달러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1946년 1월경 소련군을 위해 일했던 번역원은 200루블, 약 40달러의 월급을 받았다. 또 1950년 2월 북한의 소위가 약 260달러를 받았다. 한반도에 대한 소련과 미국의 관심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구 이승만의 임시정부 환국행사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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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후 친일파가 많이 기용됐다는 지적과 비판이 있다.
=경찰, 군대, 그리고 기타 행정부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중학교 졸업 출신의 학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해방 직후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수가 약 2만5000명 밖에 없었다. 행정 경험 유무를 떠나서 학력만 갖고 따진 수치가 이렇다. 이들이 모두 동원되더라도 경찰이나 군대에 필요한 인원수의 3분의 1~4분의 1에 불과했다. 그래서 좌익들이 주도한 각종 폭동을 진압하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였다. 또 해방 직후엔 일제 강점기 근무 경력이 일종의 '주홍글씨'였다. 경력자들이 도망을 다녀서 억지로 잡아 동원할 정도였다. 이렇게 인원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결국 총독부에서 일한 관료나 경찰이 등용됐고, 공권력 일부는 우파 청년단에 의존하게 되는 문제점이 발생했다.
-그래도 남한이 프랑스처럼 인적 청산이 철저하지 않은 것은 문제 아닌가
=유럽사의 권위자 마크 마조워 교수의 책 『암흑의 대륙』을 보면 경찰이나 군대, 기타 행정기구 등은 특수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이유로 나치 치하에서 부역한 프랑스 정부의 관리들도 잘 숙청되지 않았다. 심지어 공산 정권이 수립된 동유럽 국가들도 그 노하우를 단기간에 습득하기 어려워서 나치 치하에서 부역한 경찰, 군인, 관리들이 상당수 남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미군정도 친일파 문제는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정 치하에서 발간한 교과서에 홍익인간이나 임시정부가 채택한 삼균주의의 이념을 강조했고, 임시정부 부주석 출신 김규식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임시정부 지도자였던 김구나 이승만을 지원한 것도 마찬가지다.
해방정국 주역들인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하지(45년 11월 24일, 김구 귀국 다음 날). [중앙포토] |
-'취약국가'인 대한민국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미국이 지원한 국가건설 사례들을 집약하여 만들어낸 일종의 표준국가모델과 비교하면 한국은 국가건설 자금의 26분의 1에 불과한 지원으로 만들어진 국가다. 미국이 유럽에 집중하느라 충분한 예산을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한국은 부르주아 계층도 부재했기 때문에 결국 국민들이 그 부담과 비용을 감당해야 했는데 너무 가난했다. 그래서 정부는 한국인들이 가진 애국심, 민족주의란 이념 자원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부도 '반일민족주의'를 사용했다. 부일(附日) 경력이 있던 관료들에게 적은 급료를 지불하면서 이를 민족을 배반했던 과오를 씻을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라며 정당화 시켰다. 국민으로부터는 자발적 헌신과 기부를 유도해 여러 면에서 자원들의 부족함을 메웠고 근대국가 건설을 진행해야 했다. 이렇게 이념적 자원을 동원하는 방식은 이후 정부에도 이어졌다. 평화의댐 모금이나 IMF 금모으기 등이 대표적 사례다. 이런 과정에서 과도한 민족적 종족주의의 부작용도 불거졌다. 이젠 다문화 공동체를 한국인으로 품어줄 수 있는 시민적 민족주의(Civic Nationalism)의 양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의 40대 이상 냉전 세대와 달리 어렸을 때부터 국제화 경험을 한 10~30대가 주도하는 앞으로의 한국 사회는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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