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정치란 훌륭한 정치를 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최선의 정치는 순리를 따르는데서 이루어진다.” |
오래전 경기도 일산의 아람누리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쓰여 있던 문장이다. 조선시대 문인이며 방랑시인이었던 김시습의 산문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최초의 한문소설이라는 ‘금오신화’는 너무 관념적이라 재미가 없어 읽다가 그만뒀지만 김시습의 산문은 놀랄 만큼 생동감 넘치고 진실하고 당대의 삶을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신동으로 이름을 떨치다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나 어이어이해 시대와 타협하지 못하고 떠도는 삶을 살다간 불행한 지식인. 버림받은 시인이 동서고금에 어이 한둘이겠냐마는, 그의 산문은 정직함의 깊이가 특별했다. 세속의 부귀를 멀리하고 청빈을 선택했다지만 한때 그도 안온한 삶을 꿈꾸었다. 그의 재능과 사람됨에 반한 혹은 그의 처지를 동정한 세도가들이 그를 위해 마련한 작은 벼슬을 마다하지 않고 정착했다, 벼슬과 소유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이런저런 귀찮은 일에 염증을 느껴 떠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어디에 얽매이기 싫으면서도 누군가에게 발견돼 자신의 생각과 포부를 펼치기를 간절히 원했던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정치에 뜻이 없는 사람이 그처럼 열심히 당대의 정치를 비판할까. 정치에 아예 관심이 없으면 비판의 열정도 식기 마련 아닌가. 김시습이라는 걸출한 교양인의 내면을 분석하는 게 원래 내 글의 의도는 아니었다.
내가 눈 오는 일요일 아침에 하고 싶은 말은 ‘순리(順理)’였다. 너무 시끄럽게 일을 벌이지 마라. 시끄럽고 독하게 마치 댐 공사하듯 밀어붙이지 말고, 겨울이면 눈이 오듯 아주 당연하고 쉽게, 개혁을 하는지도 모르게 개혁을 하시라.
어느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이 내렸듯이 때가 되면 세상은 변한다. 내 글을 읽으며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글을 끝내기도 전에, 쓰기 전부터 그들의 시선이 느껴져 나도 불편했다. 맹목적으로 누구를 지지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 사랑과 증오로 흐려진 눈을 가진 사람들.
나는 남의 눈치 보는 거 싫어하는데, 자기검열을 하느라 편하게 잡문도 쓰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 노무현 정권 때 신문에 한두 번 정부를 비판하는 칼럼을 쓰면서 나는 독자의 반응을 염려하지 않았다. 요즘 정치적인 메시지가 담긴 글을 쓰려면 때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누구의 눈치를 봐서가 아니라, 그들의 심기를 건드려 귀찮은 일이 생길까 봐 바른말 하기가 힘들어졌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 침묵하는 사이에, 침묵을 강요당한 사이에 우리 사회 표현의 자유가 많이 후퇴했다. SNS를 통해 감정과 생각들이 빠르게 전파되어 갈등이 더 심화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창밖이 하얗다. 가슴이 뛰었다. 분리수거와 청소 따위의 집안일을 마치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아파트 복도에 방치된 작은 ‘눈사람’을 발견했다. 반쯤 녹아내렸지만 지푸라기인지, 나무막대인지가 얼굴에 꽂힌, 대충이 아니라 제대로 만들려 노력한 흔적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요새 아이들도 눈사람을 만들며 노는구나. 세상이 아주 망하지는 않겠다. 여기 경기도 고양시만 아니라 서울 강남의 아이들도 눈사람을 만들까?
최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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